도덕과 교육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나의 경험 - 그에 대한 교육적 사례

 1  도덕과 교육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나의 경험 - 그에 대한 교육적 사례-1
 2  도덕과 교육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나의 경험 - 그에 대한 교육적 사례-2
 3  도덕과 교육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나의 경험 - 그에 대한 교육적 사례-3
 4  도덕과 교육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나의 경험 - 그에 대한 교육적 사례-4
 5  도덕과 교육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나의 경험 - 그에 대한 교육적 사례-5
 6  도덕과 교육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나의 경험 - 그에 대한 교육적 사례-6
 7  도덕과 교육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나의 경험 - 그에 대한 교육적 사례-7
 8  도덕과 교육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나의 경험 - 그에 대한 교육적 사례-8
 9  도덕과 교육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나의 경험 - 그에 대한 교육적 사례-9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도덕과 교육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나의 경험 - 그에 대한 교육적 사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나의 경험
그에 대한 교육적 사례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이다.
덕은 개인에 상대적이다.
삶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다.
선의지가 중요하다.
........
행복, 중용,
실천적 지혜
덕, 습관화,
형상과 질료
blahblah.....
DESIGN BY KUKJIHYOUN
1.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니코마쿠스 윤리학』과 『에우데모스 윤리학』이라는 두 논문에서 발견된다. 보통 원전은 혼란스럽고 많은 일탈들을 포함하긴 해도, 그 안에서는 일관된 윤리 이론이 전개된다. 때로는 덕을 가리키는 헬라스에서 온 ‘aretaic 윤리학’으로 불리는 덕 윤리학은 도덕철학을 지배하는 세 주된 윤리 이론들 가운데 하나를 형성한다. 다른 둘은 결과주의와 의무론이다. 결과주의에서는 우리가 언제나 우리 행위들이 기대한 결과에 관해 생각해야만 한다고 말하며, 의무론은 결과와 상관없이 규칙에 따라 행하고 행하지 말아야만 한다는 견해를 취한다.
윤리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의는 젊은이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활발히 활동하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이것은 그들의 삶에 돈이나 권력, 공공의 존경과 같은 성공의 표시들을 확실히 담아내기 위해 그들이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에 관한 질문이 아니다. 이런 성공 표시들이 성공적인 삶에 필요한 것일 수는 있지만, 성공을 구성하지는 못한다. 그의 목적론적 형이상학에서 나온 대답은, 만일 그들이 그들의 삶을 인간의 목적이나 기능에 따라 충분히 살아간다면, 성공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성공을 하기 위해, 그들은 이성적이며 덕이 있는 삶을 사아야만 한다. 바로 이점이 이런 주제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글들을 기차역 서점에서 발견되는 자기 계발서들과는 달리 도덕철학의 성과로 만든다.
이 ‘삶의 계획’은 영어로 번역될 때 다소 과장되고 부자연스럽게 들린다. “평온 및 많은 활동과 함께하는 만족한, 성취한, 그리고 활발히 활동하는 삶”이라는 부분이 행복을 요약해 보여준다. 부자연스럽게 들리는 이유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에서 성공을 순전히 물질적인 방법들로 측정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라는 것은 명성과 공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남들한테 존경을 받고 자존심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이 궁극의 목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경우에서든 그는 이렇게 예리하게 지적하여 말한다.
“공적인 명예는 우리한테 그것을 받는 사람들보다는 그것을 주는 사람들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지.”
그것은 또한 쾌락적 삶일 수도 있지만, 그는 이에 관해 확고한 견해를 갖고 있다. 그는 쾌락을 하나의 좋은 것으로 보지, 좋은 것 자체로 보지는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단지 그들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종종 그들의 삶을 쾌락에 바치는 것 같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나쁜 본보기가 되어 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모방하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동물과 아이들에게나 어울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쾌락을 사고, 그것을 우리가 일하여 얻을 수 있는 상품처럼 취급하는 것은 인간에게 제일 좋은 것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인들은 동물이나 어린아이들보다 더 나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쾌락은 활동을 완성하는 어떤 것이다. 우리가 어떤 유익하고 생산적인 일에 열중할 때, 특히 우리가 그것을 잘 해내고 있다면 우리는 자신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시간의 경과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진정한 쾌락이다.
사실 그는 ‘완전한’ 행복이란 지적인 관상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믿는다. 자연의 삼라만상을 탐구하고 찬미하는 데 삶을 바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최선의 활동이다. 지혜는 최상의 지적인 덕으로 학문적 지식과 직관이 결합된 것이다. 이런 종류의 관상은 기도의 형태와 같다. “만일 지성이 인간과 비교되는 신적인 것이라면, 지성의 삶은 인간의 삶과 비교되는 신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다시 “우리는 우리 안에 내재하는 한 불멸성을 얻으려 해야 하며,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최상의 것에 따라서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관상하는 삶을 보낼 수 있으리라는 것이 우리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분명하기 때문에, 그것은 의구심을 갖게 하는 부분으로 남는다. 하지만 그는 그의 윤리학에 영향력과 지속적인 의미를 부여했던 행복에 관해 다르게 언급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행복을 정신활동, 그것은 사유와 관조의 활동에서 찾았지만 다른 요소를 배척하지는 않았다. 정신적 선(좋음), 신체적 선(아름다움), 외부적 선(재산이나 권력)까지 필요하다는 말을 했는데 아무리 아리스토텔레스가 현실주의적 관점이라고 해도 이것은 속물적인 행복론이다. 굶주림 앞에서 내세의 행복을 말하는 것은 관념적 이상을 빙자한 사이비라서 현실주의가 참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 탐닉한다면 극단적인 어리석음에 빠져 물질이나 감성적 욕구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관상적인 삶을 살 여유가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일정한 수준의 물질적 행복에 이르고 불운을 피하는 것이 시작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좋은가하는 물음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각자가 추구하는 욕구가 좋은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선이나 좋은 것을 말하든지 간에 만약에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도 동의할 수도 없으면 소외된 가치에 불과하며 우리의 삶을 밖으로부터 억압해 들어오는 타율적 강제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서 우리의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하고 물었고 우리의 삶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것들 가운데 최고로 좋은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행복이라고 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행해지길 원하지 않으므로 행복은 보편적으로 추구되는 가치이다. 또한 행복은 그것 아닌 다른 것을 위해 수단적으로 추구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무엇을 위해 행복하게 되려고 하는가?’ 란 질문이 성립할 수 없듯이 행복은 그 자체로 추구되는 좋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