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과 조선의 조공 책봉관계 조선외교정책 중국대외관계 한중조공책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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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명과 조선의 조공 책봉관계
1. 머 리 말
한국과 중국은 대륙과 바다로 이어져 있어 오랜 동안 상호교류의 역사를 지녀왔다. 양국간에 정치 ·경제 · 문화 등 여러 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상호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며 유대를 공고히 하여 왔음이 사실이다. 물론 양국간에 무력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오랜 동안 우호를 증진하며 평화적인 문화교류의 시기가 더 많았다 할 수 있다.
특히 14세기 후반 중국에서의 명조의 성립과 더불어, 한반도에서는 고려 말 이성계의 조선왕조가 새로 성립되었는데, 조선은 전기에 많은 문화 발전을 이룩하였다. 건국 후 중앙집권체제의 강화와 국력 신장, 사회 개혁안과 산업의 진흥, 사대교린에 의한 원만한 외교 등으로 민생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자, 이것을 토대로 15세기에 이미 전통문화와 외래문화를 폭 넓게 절충하면서 개성 있는 민족문화를 창출한 것이다.
조선 전기에 해당하는 14~16세기, 조선과 명과의 교류관계, 특히 중국 문화의 유입에 중점을 두고, 그것들이 조선문화 형성에 어떻게 작용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의 조선
1368년 몽고족인 원 왕조를 몰아내고 마침내 明(1368-1644)을 건국한 태조 洪武帝(1368-1398)는 대내적으로 사회 경제적 안정과 중앙집권적 군주독재체제의 강화를 꾀함과 동시에 天子로서 주변의 타민족에 대하여 대외적으로 조공관계와 책봉체제를 취하면서 그야말로 明 황제를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를 형성하려 하였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역대 왕조의 대외관계는 대체로 조공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이루어져 왔다. 중국은 타민족과 관계를 설정하는데 있어서 양자사이에 대등한 관계는 고려하지 않았으며, 중국 황제가 조공을 요구하고 그에 따라 조공을 받친 자에 대하여 황제가 책봉하여 상호 군신관계를 맺음으로서 비로소 양자의 관계가 성립되는 정치적 관계였다. 조공이란 타민족의 왕이나 사신이 황제에 알현하고 선물을 헌납하여 군신의 예를 갖추는 것을 말하며 기본적으로는 종속관계를 표시하는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한나라 때부터 시작되어 한족의 국가 明 역시 조공제도 하에서만 교류를 인정하는 책봉체제를 통해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유지하려 하였다. 당시 중국 주변 국가들은 중국이 요구하는 조공관례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공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없고 선진문물을 도입도 기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국의 정치적 권위와 국가의 명맥도 보장 될 수 없었다. 조공은 물건을 바치는 것뿐만 아니라 중국 황제로부터 많은 물건을 하사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이러한 조공은 조공하는 국가측의 입장에서는 중국물자의 획득 및 중국 문화의 도입이라는 측면 외에 자신의 국내 정권의 보강이라는 성격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시아 여러 주변 국가들은 중국과 조공관계 하에 놓여 있었으며, 이것은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는 국제 질서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한반도에서는 고려말 친원 친명의 대립은 1388년 명의 철령위 설치문제로 인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그에 따른 우왕의 폐위, 최영 추방, 1389년 창왕의 폐위, 공양왕의 옹립, 1392년 공양왕 양위와 이성계의 즉위로 이어지면서 조선왕조가 개국(7월 17일)되었다. 그리고 다음달 8월에는 사신을 명 태조에게 보내어 이성계 즉위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이성계는 명의 승인을 받음으로써 국내적으로 왕권을 확립하여 신왕조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국제적으로 안전을 보장받으며 나아가 당시 명에 의해 재편성된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에 참여하여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서둘러 명에 사신을 보내었던 것이다. 당시 동아시아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인 명의 승인을 통해 지배체제의 안전성을 확보하고, 명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이성계의 외교적 수완에서 이루어진 조처였다. 이리하여 조선은 대외적으로 이른바 사대교린 정책을 취해 明 제국은 동아시아 유일한 정치군사경제문화의 대국으로, 조선의 지배 이념인 성리학적 유교문화의 종주국이고, 풍부한 물자를 얻을 수 있는 교역 대상국이며, 과학기술을 비롯한 문화 선진국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저항 없이 수용하였던 것이다.
3. 朝 · 明 조공무역과 중국문물의 유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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