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학 교육과 에큐메니즘(평양신학교와 감리교신학교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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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신학 교육과 에큐메니즘(평양신학교와 감리교신학교를 중심으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국 신학 교육과 에큐메니즘
(평양신학교와 감리교신학교를 중심으로)
1. 서 론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이 보여 주었던 주체적 복음 수용과 전파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준 한국 기독교는 특히 장로교와 감리교의 신학교가 세워지면서 세계 기독교 사상 유래 없는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개화기 한국 교회의 신학 교육은 미국 개신교의 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것은 한국 개신교 선교의 주체가 미국 교회 가운데 특히 남 북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였으며, 기타 지역에서 파송되거나 자원입국한 선교사 또한 캐나다와 호주, 영국 등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전래는 1880년대이지만 신학교육은 1900년대에 들어서 비로써 시작되었는데, 본 고에서는 개화기 당시의 대표적인 신학 교육 기관이었던 평양신학교와 감리교(협성)신학교의 설립 배경과 교육 내용을 살펴보며 그 안에 드러나는 신학적 통합과 갈등, 분열에 관해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2. 평양(장로교)신학교의 설립배경과 신학
한국 기독교 초기 신학교육은 매서인, 전도부인과 같은 한국인 전도인 양성에 목적을 두고 시작되었다. 이것은 ‘한국인’에게는 한국인이 전도하게 한다는 네비어스의 신학 정책 중 자력 전도 원칙에 근거한 방침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신학교육은 1900년 이전에 신학반 신학반은 주로 겨울 농한기를 이용하여 한국인 전도인들을 대상으로 1~2 개월간 실시하던 단기 신학과정이었다.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다가 1900년 대 초반, 신학반은 정규 신학교로 발전하게 된다. 장로교의 경우 1901년부터 마펫이 주도해서 설립한 신학교가 미국 북장로회, 남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의 4개 선교부 연합의 평양장로회신학교로 발전하였다. 당시 평양신학교의 교수진은 북장로교 선교부 소속의 원두우, 남장로교선교부 소속의 전킨, 이눌서 그리고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 소속의 엥겔,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 소속의 푸트였다. 하지만 이들이 실제로 교수하기 시작한 때는 1907년부터이다. 이전에는 북장로교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이 주로 교수하였으나 이제는 한국에 입국한 4개 선교부 소속의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평양 장로교신학교에서 교수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평양신학교가 복음주의적 연합정신에 기초한 학교로 거듭나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평양신학교의 신학적 성격을 블레어는 “역사적 칼빈주의의 배경을 지니고 웨스트민스터 표준을 수용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심치 않고 받아들이는” 지극히 보수적인 신학으로 논평하였다. Report of the 50th Anniversary Celebration of the Korea. p121
이러한 보수적인 신학적 경향은 당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 때문이라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신학은 보스턴 지역에서 온 소수의 감리교 선교사와 뉴욕 유니온 신학교 출신 소수의 장로교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극히 보수적 신학의 소유자들이었다. 평양 신학교가 한국 교회를 주도하는 신학교로 발전하기까지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던 선교사들은 마펫, 레이놀드(이눌서), 클락(곽안련) 3인이었는데 그 중 마펫과 클락은 맥코믹 신학교 출신이었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1』 (2005) 제2권, 44-45
맥코믹 신학교는 시카고에 위치하여 신학적으로는 프린스턴과 같은 구학파 신학을 계승하면서도 무디의 영향하에 있는 지리적인 여건으로 미국의 구학파의 일반적인 분위기보다 부흥운동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마펫에 이어 제2대 평양신학교 교장이 된 라부열(Stacy L. Robert)은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으로 그는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평양신학교 교수로 봉직한 초기 선교사들은 보수적이며 복음적 인물들로 이들은 성경의 무오와 권위를 믿었고, 프린스턴 신학교의 신학적 전통을 계승한 구학파의 입장에서 신학을 해석하고 가르쳤다. 이와 같이 평양신학교의 신학적 성향은 구학파의 전통을 고수하는 배경과 함께 한국 내에서 상이한 교파적 성향들을 통일하려는 연합적 성격도 혼재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그 당시 상황 속에서 교리를 갖춘 교회지도자로서 보다는 한국 교회를 위한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목회자 양성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박용규. 87.
3. 협성(감리교)신학교의 설립 배경과 신학
미감리회의 아펜젤러는 1888년 선교 보고에서 배제학당과 연관지어 ‘신학부’를 설치하고 학생 3명을 교육하고 있음을 밝혔다. 이 신학반은 1899년부터 한국인들에 의해 신학회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당시 감리교 신학회 교과 과정이 교파 교리나 교파 신조보다는 기독교 일반 교리와 철학적 인식론에 초점이 맞추어져 교파 신학(남북 감리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또 구체적인 교육 방법에서는 동양 철학의 개념과 인식론을 채용한 것을 볼 때에, 신학의 ‘토착화’ 일면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신학회로 대변되는 초기 신학 교육은 한국인의 신학 교육 요청에 의해 시작되어, 기독교 신앙 및 신학을 한국 상황에서 해석하여 수용하는 통로가 되었고, 신학 교육을 통해 복음의 토착화와 민족의식에 대한 관심이 표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905년부터 남북 감리교회에서 정규 신학교 설립을 적극 추진하여 마침내 1907년에 남감리회와 북감리회, 두 교회 연합의 협성신학교가 탄생되었다. 이덕주, 『초기한국기독교사연구』 (서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5) 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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