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사] 조선 중기의 문장가 신흠 - 삶, 인생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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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전문학사] 조선 중기의 문장가 신흠 - 삶, 인생관, 작품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문장가(文章家) 신흠(申欽)
-신흠(申欽)의 작품에 나타난 그의 삶(生)과 인생관(人生觀)에 관해서-
목차(目次)
Ⅰ. 서론(序論)
Ⅱ. 본론(本論)
1. 상촌(象村)신흠(申欽)
2. 작품에 내재(內在)한 신흠(申欽)의 심경(心境)과 가치관(價値觀)
1)임진왜란(壬辰倭亂)의 상황과 신흠(申欽)
2)계축옥사(癸丑獄事)의 상황과 신흠(申欽)
3)삶을 대하는 신흠(申欽)의 태도
Ⅲ.결론(結論)
*참고자료
Ⅰ. 서론(序論)
고전 작품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지침서와 같은 역할을 해준다. 살아가다보면 자칫 잊게 될 수 있는 신념, 도덕 등을 되살려주고 알려준다. 또한 과거를 살아갔던 선현(先賢)들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고전 작품은 오랜 세월동안 읽히고 연구되는 것이다. 장구한 시간을 지나서 지금까지도 남아서 읽히는 작품들은 이 사실 만으로도 그 우수성과 가치가 충분히 입증된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번 연구에서 연구 대상으로 선정한 작가는 신흠(申欽)이다. 신흠은 선조 때 문장으로 뛰어났던 네명의 문장가,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중 한사람으로 월사(月沙)이정구(李廷龜), 계곡(谿谷)장유(張維), 택당(澤堂)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선조 때의 명문장 사대가인 상월계택(象月溪澤)으로 일컬어진다. 이렇듯 신흠의 문장력의 뛰어남은 인정받고 있으며 그의 작품들 역시 널리 알려져 있고 읽히는데 그 문학사적 의의와 가치는 높다고 평가되고 있다.
해당 연구에서는 신흠이 남긴 작품들을 통해 그 안에 내재돼 있는 신흠의 심정과 세계관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알아 볼 것이다. 우선 작품을 해석할 때 작가와 시대 상황을 고려해서 해석 할 것이다. 해당 작품의 내용과 작가의 생애를 대응시키면서 당시 작가가 어떤 심정으로 시를 노래했는지에 대해 유추해 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작가 신흠에 대해서 알아보고 작품 분석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분석할 신흠의 작품들은 한 종류에 국한 하지 않을 것이다. 한시와 시조 수필 등 신흠이 남긴 작품들을 두루 볼 것이다. 신흠이 작품에 자신의 사상과 심정을 얼마나 미학적으로 그려냈는지에 대한 것 역시 작품 분석 과정에서 함께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에 실린 작품들은 모두가 신흠(申欽)의 작품이며 그 출처는 김주백, 「象村 申欽의 詩文學 硏究 = A study on Sangchon Shin Heums poetry」, 단국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논문 (1997)에 실린 것을 재인용을 한 『상촌고(象村稿)』의 한시를 제외하고는 모두 김수진(편역)의 『신흠 선집- 풀이 되고 나무가 되고 강물이 되어』, 돌베개 (2006)에서 번역된 것을 사용했다.
Ⅱ. 본론(本論)
1. 상촌(象村)신흠(申欽)
신흠(申欽)은 조선 중기 때의 학자이자 정치가 이다. 자는 경숙(敬叔)이고 호는 상촌(象村), 현헌(玄軒), 현옹(玄翁), 방옹(放翁)이며 시호는 문정(文貞) 본관은 평산(平山)이다.의 연보를 보자면 이러하다. 신흠은 1566년 명종(明宗)때 개성부 도사 신승서(申乘緖)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그러다가 7세에 부모를 잃고 외조부인 송기수(宋麒壽) 아래에서 자라면서 학문을 배운다. 1586년 선조(先祖)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지만 동인들의 배척으로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다가 사재감참봉이 된다. 1589년에 춘추관 관원에 뽑히면서 예문관 검열(檢閱)·대교(待敎)·봉교(奉敎)를 역임한다. 이러던 중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신흠은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고 정철(鄭撤)의 종사관으로 활약하는데 이 공으로 지평으로 승진된다. 1594년에는 서장관(書將官)으로 명에 다녀온다. 선조의 총애를 받았던 신흠은 1599년 장남 신익성(申翼聖)을 선조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시키게 된다. 이후로 신흠은 예조 참판, 병조참판, 예문관 제학,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한다. 1608년 2월에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집권하게 된다. 이때 신흠은 광해군의 대사헌 제수를 거듭 사양하고 다음 해에 세자책봉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게 된다. 그러나 1616년 계축옥사(癸丑獄使) 계축옥사(癸丑獄事):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등 대북파(大北派)가 소북파(小北派)를 몰아내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다. 선조의 적자(嫡子)이며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그의 생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친정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주도하여 왕으로 옹립하려 하는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허위자백을 구실로 김제남을 죽이고, 당시 영의정이던 유영경(柳永慶)을 독약을 내려 죽게 하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만들어 강화도로 유배 보내고 종국에는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으로 하여금 영창대군을 불에 타서 죽게 하는 등 소북파를 몰아낸 사건이다. 이 사건이 계축년(1613)에 일어났기 때문에 계축화옥 또는 계축옥사라고 한다
가 일어나고 이 때 신흠은 유교칠신(遺敎七臣) 유교칠신(遺敎七臣): 선조가 승하할 때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 받은 일곱 신하이다. 일곱 사람은 유영경(柳永慶), 한응인(韓應寅), 박동량(朴東亮), 서성(徐), 신흠(申欽), 허성(許筬), 한준겸(韓浚謙)이다
중 하나로 지목되어 파직된다. 파직된 신흠은 양포(楊浦) 강가에서 체류하다가 김포로 내려가게 되고 그곳에서 「방옹시여서」(放翁時餘序)를 짓는다. 1614년에는 숙부 신광서(申光緖)의 집에 얹혀서 살다가 그 해 2월 동자산(童子山) 기슭에 집을 짓고 이사한다. 1616년에는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려는 것에 반대하다가 죄가 더해져서 이 해 겨울 노량 강변에서 유배의 명을 기다리다가 다음해 1월에 춘천으로 유배된다. 그러다 1621년 8월에 사면되어 다시 김포로 돌아온다. 김포에서 생활하던 중 1623년 인조반정 인조반정(仁祖反正):1623년 이귀(李貴)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이종(李倧)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이다
으로 인한 인조(仁祖)의 즉위와 함께 이조판서 및 홍문관 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에 임명되고 7월에는 우의정에 발탁된다. 1927년 정묘호란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 후금(後金)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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