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을 말하다 - 작가에 대하여, 시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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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을 말하다 - 작가에 대하여, 시의 특성,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김소월을 말하다
1. 머리말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나의 학창 시절 너무도 애절하게 들려오던 이 시는 노래가사가 되어 많이도 불러보던 시다. 학창시절 김소월이란 이름은 나에게 시가 전해주는 아름다운 세계를 느끼게 해 준 작가이며 한국인이라면 그의 이름과 시 한 편쯤은 생각 할 수 있을 것이다. 개화기 이후 많은 시인들이 있었지만 소월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던 시인은 드물 것이다. 그 만큼 대중적인 매력을 갖고 있다 하겠다. 그것은 아마도 소월의 시가 우리의 민중정서, 그리고 우리의 민족 정서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소월시의 기본 정서를 이루는 한(恨)은 민중적인 속성과 민족적인 속성을 함께 내포하고 있는 정서이다. 흔히 한을 우리 민족성의 표상이라고 하듯이 한은 우리 민족에게는 고유정서임에 틀림없다. 나는 이번 과제를 통해 김소월 작가의 시 세계를 살펴보고 그의 시 세계에 전반적으로 담겨있는 낭만주의에 대해서도 알아보고자 한다.
2. 작가 김소월 (1902~1934)
소월은 한국의 대표적인 근대 시인이다. 본관은 공주(公州). 본명은 정식(廷湜). 평안북도 구성 출생. 아버지는 성도(性燾), 어머니는 장경숙(張景淑)이다. 2세 때 아버지가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정신병을 앓게 되어 광산업을 하던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고 성장하였다. 사립인 남산학교(南山學校)를 거쳐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에 다니던 중 3·1운동 직후 한때 폐교되자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 졸업하였다. 1923년 일본 동경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9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오산학교 시절에 조만식(曺晩植)을 교장으로 서춘(徐椿)·이돈화(李敦化)·김억(金億)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특히, 그의 시재(詩才)를 인정한 김억을 만난 것이 그의 시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문단의 벗으로는 나도향(羅稻香)이 있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 일을 도우며 고향에 있었으나 광산업의 실패로 가세가 크게 기울어져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동아일보지국을 개설, 경영하였으나 실패한 뒤 심한 염세증에 빠졌다.
소월은 1934년 12월 23일에 죽음을 맞이한다. 구성에서 9년째 살고 있었던 소월은 이 해 가을,그간 방문한 적이 없었던 고향 곽산 남산리를 방문한다. 그의 숙모 계희영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 바 있다.
1930년대에 들어서 작품활동은 저조해졌고 그 위에 생활고가 겹쳐서 생에 대한 의욕을 잃기 시작하였다. 소월은 고향을 떠나서 구성 남시로 내려가 9년동안 두문불출하고 은거생활을 계속하며 나날을 보냈다./그리고 가정 생활에 대해서 도 매무 무관심하였고 온종일 술에 취해서 살았다. 날이 갈수록 문밖 출입을 소월은 더욱 싫어했다 그러던 어느날 무슨 생각에 장에 갔었는지 돌아오는 길에 생아편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1934년에 고향 곽산에 돌아가 아편을 먹고 자살하였다.
시작활동은 1920년 ≪창조 創造≫에 시 <낭인(浪人)의 봄>·<야(夜)의 우적(雨滴)>·<오과(午過)의 읍(泣)>·<그리워>·<춘강 春崗> 등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작품발표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1922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인데, 주로 ≪개벽≫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이 무렵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로는, 1922년 ≪개벽≫에 실린 <금잔디>·<첫치마>·<엄마야 누나야>·<진달래꽃>·<개여울>·<제비>·<강촌 江村> 등이 있고, 1923년 같은 잡지에 실린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삭주구성 朔州龜城>·<가는 길>·<산 山>, ≪배재≫ 2호의 <접동>, ≪신천지 新天地≫의 <왕십리 往十里> 등이 있다. 소월의 시작활동은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고 1925년 5월 ≪개벽≫에 시론 <시혼 詩魂>을 발표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집에는 그동안 써두었던 전 작품 126편이 수록되었다. 이 시집은 그의 전반기의 작품경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당시 시단의 수준을 한층 향상시킨 작품집으로서 한국시단의 이정표 구실을 한다.
생에 대한 깨달음은 <산유화>·<첫치마>·<금잔디>·<달맞이> 등에서 피고 지는 꽃의 생명원리, 태어나고 죽는 인생원리, 생성하고 소멸하는 존재원리에 관한 통찰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시 <진달래꽃>·<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먼후일>·<꽃촉불 켜는 밤>·<못잊어> 등에서는 만나고 떠나는 사랑의 원리를 통한 삶의 인식을 보여줌으로써 단순한 민요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생에 대한 인식은 시론 <시혼>에서 역설적 상황을 지닌 ‘음영의 시학’이라는, 상징시학으로 전개되고 있다. 시집 ≪진달래꽃≫ 이후의 후기 시에서는 현실인식과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부각된다. 1981년 예술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시비가 서울 남산에 세워져 있다. 저서로 생전에 출간한 ≪진달래꽃≫ 외에 사후에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 素月詩抄≫(1939), 하동호(河東鎬)·백순재(白淳在) 공편의 ≪못잊을 그사람≫(1966)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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