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도덕교육]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가 주는 의미와 그 이론을 전달하기 위한 생각들

 1  [초등도덕교육]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가 주는 의미와 그 이론을 전달하기 위한 생각들-1
 2  [초등도덕교육]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가 주는 의미와 그 이론을 전달하기 위한 생각들-2
 3  [초등도덕교육]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가 주는 의미와 그 이론을 전달하기 위한 생각들-3
 4  [초등도덕교육]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가 주는 의미와 그 이론을 전달하기 위한 생각들-4
 5  [초등도덕교육]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가 주는 의미와 그 이론을 전달하기 위한 생각들-5
 6  [초등도덕교육]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가 주는 의미와 그 이론을 전달하기 위한 생각들-6
 7  [초등도덕교육]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가 주는 의미와 그 이론을 전달하기 위한 생각들-7
 8  [초등도덕교육]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가 주는 의미와 그 이론을 전달하기 위한 생각들-8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초등도덕교육]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가 주는 의미와 그 이론을 전달하기 위한 생각들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가 주는 의미와 그 이론을 전달하기 위한 생각들.
(1)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생관 또는 사상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영향으로 자연은 어떤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플라톤은 참된 이데아를 꿈꾸며 영혼의 순수함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오직 현재적 삶 밖에 없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육체와 영혼이 결합되어 있는 상태를 살아 있다고 하는데 죽음은 이 둘을 분리시키므로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든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일이라고 했다. 이것은, 선과 정의는 바로 지금, 현실세계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이상보다 현실을 중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실현 불가능한 선은 참된 선이 아니며 인간에게 유익함을 주지 않는 선은 선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첫머리는 ‘모든 기술과 탐구 또한 모든 종류의 의식적 행위는 어떤 선을 성취를 목표 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그는 우선 우리 인간의 행위가 기계론적이고 물리적인 사건이 아니라 목적을 추구하려는 행위자의 의도와 목적이 담겨있는 목적 지향적이고 능동적인 것임을 주장한다. 게다가 무엇이 좋은가라는 물음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각자가 추구하는 욕구가 좋은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행위를 할 때마다 지향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행위의 목적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수행되는 모든 행위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나름대로의 어떤 목적을 추구하고 있는데 그것은 또한 더욱 높은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목적과 수단의 도식이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중첩되어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목적도 없이 하는 행위는 맹목적인 것이다. 따라서 삶이 공허한 맹목적 유희가 되지 않으려면 궁극적인 목적이 있어야 한다. 이 최고의 선은 두 가지의 성질을 갖추고 있어야만 하는데 그 하나는 궁극성이다. 즉 그것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곧 목적이라는 궁극성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다른 하나의 성질은 완전성이다. 즉 여기에 다른 어떤 것을 더할 필요가 없이 그 자체로 충분한 자기 충족성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서 우리의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하고 물었고 우리의 삶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것들 가운데 최고로 좋은 것summum bonum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행복’이라고 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행복이 쾌락이나 부나 명예처럼 맹백히 보이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각 사람들은 서로 다른 것을 행복이라고 한다. 때로는 같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경우에 딸 서로 다른 것을 행복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병들었을 때는 건강을, 가난할 때는 부유함을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이다. 이 말은 행복을 규정할 수 없는 추상이라고 하기 위함이 아니라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것을 교정하기 위함이다
(2)덕
비슷한 말을 앞에서도 했었지만, 인간의 고유한 본성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성의 능동적 활동이다. 먹고 자는 본능과 감각에 따른 운동은 동물도 갖고 있다. 그러나 이성은 오직 인간의 영역이다. 인간의 행복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일을 소질에 맞게 이성적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성의 능력에도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참된 행복이란 우리의 이성이 탁월함을 보일 때 실현된다고 했다. 그의 표현으로는 덕(탁월함)에 따른 정신의 활동이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함에 있어서 뛰어난 것, 탁월한 것이 곧 덕과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좋은 삶과 행복의 원천이 된다는 탁월성으로서의 덕을 중시하였다. 즉 인간으로서 잘 살며 잘 행한다는 것은 어떠한 특수한 기술이나 도구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니고 있는 능력과 기능을 잘 발휘하는 것이며 그러한 능력과 기능이 잘 발휘되는 것의 총체가 곧 행복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은 덕의 실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을 원한다고 해서 똑같이 행복에 도달할 수는 없다. 제일 좋은 것이라고 선택한 일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우리의 삶은 언제나 좋은 것이 자동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고 나쁜 것을 선택함에 있어서 우리가 보여주는 지속적인 경향성을 가리켜 성품이라고 불렀다. 이 성품의 탁월함이 윤리적 덕이다. 항상 좋은 것을 선택하는 성품을 가진다면 윤리적으로 덕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반면, 나쁜 길로 빠지는 원인은 정념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정념이란 “욕망·분노·공포·태연·질투·환희·사랑·증오·동경·경쟁심·연민 그리고 일반적으로 쾌락이나 고통을 수반하는 감정”들이다. 우리가 어떤 성품을 갖는가 하는 것은 정념을 어떻게 다스리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정념은 무조건 억압하고 누른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정념을 자연적인 것으로 봤으며 도덕적 판단물이 아니라고 했다. 예를 들어, 모든 성에 대한 욕망이 나쁘다고 억압한다면 인류의 종족 번식은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정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념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이다. 같은 재료로 요리를 해도 요리사에 따라 맛이 달라지듯이, 그 정념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따라 좋고 나쁨이 있다. 정념은 그 자체로 선이나 악이 아니며, 더욱이 삶에서 정념이 악으로 작용하는가 선으로 작용하는가 말해줄 사람도 없으며 명확한 기준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중용의 상태)를 가장 안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념의 영역은 동물과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부분으로서 그 자체로는 아직 선도 악도 아니며 덕도 부덕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역을 그대로 드러낸다면 우리 인간은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므로 인간이기 위해서, 인간다운 덕을 드러내기 위하여 우리는 이 부분을 바로 중용이라는 덕을 사용하여 조절하고 통제하여야 한다. 즉, 이 부분이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특히 욕구의 영역을 무조건 발휘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경우 우리는 동물과 같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을 어떤 방식으로 조절하고 통제하기 위한 기준이 필요한데 바로 그 기준으로 등장하는 것이 유명한 중용의 덕이다.
(3)중용의 덕
중용(mesotes)의 개념에 대해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항상 중간을 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의 개념과 거리가 멀다. 그는 중용의 덕이 수학적 평균으로서의 중간점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직접적 언급에 따르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중용의 개념을 알맞음, 마땅함, 적절함 등의 개념과 연결시킨다. ‘마땅한 때에, 마땅한 일에 대해서, 마땅한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마땅한 동기에 따라 그리고 마땅하게 행위 하는 것은 중간적인 최선의 일이며 이것이 덕의 특색이다.’ 그렇다면 결코 이러한 중용은 산술적인 평균으로서의 중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윤리적인 덕으로서의 중용은 욕구의 영역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우리의 태도가 지나침이나 모자람이 없이 적절하고 마땅한 방식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중용의 덕은 상황에 따라 가장 알맞은 행위를 이끌어 내는 것으로서 적중의 의미와 가까운 것이다.
그런데 욕구에는 여러 가지의 종류가 있으므로 최선의 상태로서의 중용에도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다. 이제 중용의 구체적인 덕목을 든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역시, 다음의 것들이 어떤 정해진 상태나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선 비겁함과 무모함의 사이에는 용기라는 중용이 있으며 쾌락 및 고통과 관련해서 방탕과 무감각 사이에는 절제의 덕이 있다. 그리고 재화의 획득이나 소비와 관련하여 낭비와 인색함 사이에는 관용이 있고 스스로 자신을 평가할 경우 오만과 비굴함 사이에는 긍지가 있다. 또한 무기력과 지나친 분노 사이에는 온화함이라는 중용이 존재한다. 이러한 식으로 많은 예들을 들 수 있으나 중요한 점은 이것들이 일정하게 정해진 어떤 유형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잘 조절되고 선택된 행위를 의미한다는 점이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