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연구 오태석의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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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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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오태석의 자전거
Ⅰ.외재적 분석
1.작가의 시대
+ 오태석에게
오태석은 여러번 가 자신의 살갗을 드러낸 작품임을 밝혀왔다.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그의 나이 열한 살이었다. 경무대 정무비서로 있다가 변호사로 개업했던 아버지는 6월 28일 납북됐고, 그는 충청남도 서천의 할머니댁으로 내려간다. 좀더 어렸다면 뭔지 모르고 지났을 것이고, 좀더 나이가 들었다면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갔을 열한 살 나이에 그는 6.25라는 민족상잔의 대드라마를 경험한다. 그리고 그 드라마는 연극을 하면서 관객에게 알리고 전해야 할 의무로 각인되었다고 한다. 순박하고 소박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순식간에 엄청난 파괴에 직면하여 내질렀던 원초적인 소리, 몸짓들이 그의 머리와 가슴에 깊게 박힌다. 그리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의 뒤집힘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이를 수용하고 기억하는 방법을 배운다. 할머니가 늘어지는 사투리와 저속한 시쳇말을 통해 토해내는 체념과 극복의 태도는 그가 생을 인식하는 토대가 되었다.
에는 그가 보고 느낀 것이 바탕에 깔려있다. 의 배경이 되는 등기소 화재는 그가 직접 겪었던 일이었다.
+자전거에 삽입된 그의 체험 (등기소 화재 사건)
그는 1940년 충청남도 서천군 아룽구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오세권은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2기 변호사 시험을 치른 경무대 대통령 법률 비서관이었으며 조모를 포함하여 가족은 모두 서울에 거주하였다. 당시로서 상당히 안정된 경제기반을 갖춘 중상층 가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3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오태석은 순탄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1살이 되던 해의 초여름, 천둥과 같은 폭격 소리를 듣기 이전까지 그는 평범한 어린 소년일 뿐이었다.
오태석이 남대문초등학교 4학년이던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이 38선을 넘으며 6.25 전쟁이 발발한다. 그 이튿날, 서울역 쪽에서 대포 소리와 함께 시꺼먼 연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학교 운동장에서 수업을 받던 오태석은 그와 함께 전투기 한 대가 저 편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그가 목격한 한국 전쟁의 시작이었다.
다음날 그의 아버지는 정부 요원들의 피난열차를 놓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28일경 새벽, 오태석은 밖을 좀 살피고 오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좇아 나갔다가 남대문 근처에서 쓰러져 죽은 사람을 본다. 그가 최초로 목격한 죽음이었다. 그날은 인민군 탱크가 서울로 진격해 오던 날이었다. 만인의 존경을 받던 아버지는 갑자기 들이닥친 인민군들에 의해 지프차에 실려 간다. 동네 담벼락에서 총살당하기 직전, 아버지는 인민군 고급 장교에게 불려가 그대로 행방불명된다.
오태석은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어머니와 동생들을 뒤로 한 채 본향인 충남 서천으로의 피난길을 떠난다. 8월이 되도록 전선을 따라 걸으며 50여일이나 계속된 이 여정에서, 그는 수많은 죽음들과 대면하게 된다. 특히 젖이 말라버려, 아사하여 구더기가 버글대는 아이의 썩은 시체가 제 몸을 썩히는 데에도, 끝내 아이의 죽음을 인정하지도, 시체를 내어놓으려고도 하지 않았던 한 여인의 모습은 그의 뇌리에 강하게 박힌다. 그때까지도 전쟁과 이 혼란상에 대해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던 어린 그에게 이는 당시의 비극을 비로소 절감할 수 있게 했던 계기가 된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참상은 끊이지 않는다. 자신의 친형이 순경이라는 이유만으로, 동생이 형을 돌로 쳐 죽여서 묻은 것을 다시 꺼내는 현장을 보았다. 또한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군내의 유지 백 이십 여명을 등기소에 밀어 넣고는 그 가운데 두 명으로 하여금 불을 지르게 해서 태워 죽이는 아수라도 목격한다.
“내가 현장을 본 것은 아니지만, 그 날 저녁에 읍내 저자거리를 장정들이 죽창들고 돌아다니는 건 직접 봤어요. … 그 날 아주, 바람이 좀 이상했어. 술렁술렁하고, 개가 짖고. 등기소라는 게 … 규모가 있잖아요. 그게 다 탔으니 벌겋게 보였지요.”
등기소 앞 가게 주인은 참혹함에 못 이겨 바로 그 날 저녁부터 밤에 문만 닫으면 ‘아이 뜨거워, 아이 뜨거워’ 하며 문을 열라고 소리치다가 나흘 만에 행방불명이 되었다. 오태석은 결국 남대문 옆의 죽음 하나를 피해 달아나다가 더 큰 죽음을 맞닥뜨리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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