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개론] 고산 윤선도의 생애와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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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문학개론] 고산 윤선도의 생애와 문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 고산 윤선도의 생애와 문학 ◆
▶ 들어가며
타과생이다 보니 국어교육과 답사를 가지 못하고 먼 발치에서 구경만 하게 되었다. 너무 가보고 싶었지만 사정상 가지못하고 이렇게 개인적인 조사만으로 레포트를 쓰게 되었다. 고산에 대해서는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도 많이 언급하셨기 때문에 친숙했고 또 그의 문학작품이 편안한 작품이 많기 때문에 레포트 쓰기에도 큰 무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택하게 되었는데 답사에 직접 가보지 못해서 아마 내용은 많이 미흡할 것이라고 본다. 아래에서는 고산의 생애와 문학관 그리고 몇 편의 문학작품을 조사하여 내가 고산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한다.
▶ 윤선도
본관 해남(海南). 자 약이(約而). 호 고산(孤山) ·해옹(海翁). 시호 충헌(忠憲). 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고,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慶源) 등지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 여러 관직에 임명된 것을 모두 사퇴했다. 1628년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初試)에 장원,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을 보도(輔導)했다. 1629년 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거쳐 1632년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지내고 163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문학(文學)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은거했다. 1652년(효종 3) 왕명으로 복직, 예조참의 등에 이르렀으나 서인(西人)의 중상으로 사직했다가 1657년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에 복직되었다. 1658년 동부승지(同副承旨) 때 남인(南人) 정개청(鄭介淸)의 서원(書院) 철폐를 놓고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과 논쟁,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16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를 가지고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 삼수(三水)에 유배당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卜筮) ·음양 ·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時調)에 더욱 뛰어났다. 그의 작품은 한국어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였으며 시조는 정철(鄭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사후인 1675년(숙종 1)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 윤선도의 생애
고산 윤선도 선생은 조선중기에 호남이 낳은 대시인(大詩人)이며, 조선조 시조문학을 마지막 장식한 대가로 알려진 분이다.
선생은 학문만이 아니고 철학을 위시해서 경사서 제자백가(經史書 諸子百家)에 통달하여 정치, 학문, 예술 전반에 걸쳐 조예가 깊고 천문, 음양지리, 복서, 의약 등 다방면에 통달하셨으며, 원림경영과 간척사업을 하여 오늘날까지 전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시조문학을 으뜸으로 꼽는다.
해남 六賢의 한 분으로서 향현사(鄕賢祠)인 해촌서원(海村書院:해남읍 해리 소재)에 배향된 선생은 전란과 당쟁이 소용돌이치는 격랑의 사회현실 속에서도 강직한 성품의 선비로 조선시대의 손꼽히는 지성이셨다. 정치의 중심에서 나랏일을 맡았을 때는 정성을 다하여 국가경영의 대도를 역설하셨고, 의롭지 못한 일을 보면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 결과 세차례에 걸쳐 십수년의 유배생활을 하시는등 유배와 출사, 은둔으로 이어져 있지만, 그 근본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는 정신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를 잘 형상화하여 국문학의 비조로서 우리에게 귀중한 문화유산을 남겨주신 분이다. 한시는 물론이고 국문시가는 값진 국문학의 보배이다.
고산 선생은 자기를 포함한 주변에서부터 국가사회에 이르기까지 강한 실천의지를 지니었는데, 특히 노비, 어민, 농민, 빈자 등 여러 방면의 사회적 약자에 관한 관심이 높을 뿐 아니라 각 방면에 있어서도 상당히 높은 전문지식을 갖고서 이론을 폈다. 인생의 덕목(德目)을 벼슬에 두지 않고 수신(修身)과 근행(謹行) 및 적선(積善)에 두고 있고 인자한 행실과 검소절약을 제1의 덕목으로 가르치고 있다.
▶ 고산의 업적
고산선생은 다방면에 정통하고, 이를 몸소 실천하여 새로운 지평을 이루어내었다. 고산선생은 자기를 포함한 주변에서부터 국가사회에 이르기까지 강한 실천의지를 지니었고 선생의 작품은 명상적 작품이 아니라 철저하게 생활의 실천문학이었다던가, 당시 홀대를 받던 소학(小學)을 수지독송(守持讀誦)했다던가, 간척사업과 원림조경에 뛰어들었다던가 하는 등의 남다른 경향과 풍모는 평소 경세치용 정신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도한 선구적인 업적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