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4 시기의 청년 신중국의 밑거름이 되다 운대영 증기 모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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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5 4 시기의 청년 신중국의 밑거름이 되다 운대영 증기 모택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5.4 시기의 청년,
신중국의 밑거름이 되다
목차
I. 서론
- 5.4운동 시기 시대적 정황과 청년들이 직면한 중국 사회의 문제
II. 5.4시기 靑年群像 - 운대영, 증기, 모택동을 중심으로
1. 운대영(代英)
2. 증기(曾琦)
3. 모택동(毛澤東)
III. 결론
- 참고문헌
I. 서론
1911년 중국은 신해혁명(辛亥革命)을 통해 공화정(共和政)을 배경으로 하는 중화민국(中華民國)을 수립함에도 불구하고 원세개(袁世凱)의 전제정치와 제제(帝制)운동, 장훈(張勳)의 청제복벽(淸帝復)시도, 강유위(康有爲) 중심의 공교국교화(孔敎國敎化) 운동 등 정치·문화적인 정체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이에 대한 반성과 일본의 21개조요구 1915년 1월 18일 제1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제국이 중국에 대해 요구한 21가지 특혜조건을 말하며, 중국 군벌들의 세력다툼으로 중국이 혼란한 시기였기 때문에 원세개는 이 요구를 승낙하였다.
로 망국(亡國)의 위기를 절감하면서 진보적 지식인들은 사회문화적 개혁을 갈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정신개조와 윤리혁명을 통한 개인의 독립과 개성의 해방을 추구한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이 북경대의 신지식인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강명희,「5.4운동」『강좌 중국사 Ⅵ』, 지식산업사, 1989 , 192쪽
신문화운동은 5·4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다. 1919년 5월 4일부터 2개월간 중국 전역에서 벌어진 반일(反日)애국운동은, 신문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반제(反帝)·반봉건(半封建) 운동을 정치적 지향점으로 삼는 사상혁명으로 발전하였다. 5·4운동은 신문화 운동을 확대·발전시킬 수 있는 대중적 기반을 마련하는 등 양자는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전명용,「中國의 新文化 五·四運動硏究」『中國硏究』제 19집, 韓國外國語大學校 外國學綜合硏究센터 中國硏究所 ,1997, 159~160쪽
5·4운동을 통해 사회변혁세력으로 등장한 신청년(新靑年)들은 저마다의 사회개조방안을 통해 기존의 중국사회가 갖고 있던 문제점을 타파하고자 했다. 이들의 공통된 열망인 신중국(新中國)의 효과적인 건설을 위해 다양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 중 운대영(代英)과 증기(曾琦), 모택동(毛澤東)은 각각 아나키즘, 국가주의(國家主義), 맑시즘을 수용하여 저마다의 사회개조방안을 확대·발전시켜 나갔다. 운대영, 증기, 모택동 세 사람이 갖고 있던 사회개조방안으로 어떻게 절망적인 당시 중국의 현실을 해결하고자 했는지 살펴봄으로써 그들이 갖는 활동상의 의의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II. 5.4 시기 靑年群像 - 운대영, 증기, 모택동을 중심으로
1. 운대영(代英)
운대영이 모색한 중국사회의 개조방안은 아나키즘이었다. 이 시기의 아나키즘은 혁명·파업·암살을 동반한 기존체제의 부정이라는 측면보다는 도덕적인 방향으로의 국민성을 개조하는 측면이 강조되고 있었다. 운대영도 아나키즘의 핵심을 자유·평등·박애·호조·노동 등의 정신을 실천해나가는 것에서 찾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선세력(善勢力)을 양성함으로써 사회혁명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러한 운대영의 구상은 호조사(互助社)의 조직으로 구체화되었다. 호조사는 개인의 수양, 즉 자조조인(自助助人)을 통해 국가와 사회를 개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호조사의 운영이 점차 형식적으로 변질되자, ‘정신을 중시하는’ 발전적인 방향에서 타학교 학생 교사와 연대한 인사(人社)로 재조직되었다. 또한 호조사와는 별도로 보인사(輔仁社)·일신사(日新社)·황사(黃社)를 결성하였는데, 이와 같은 일련의 단체는 모두 중국의 사회개조를 위한 선세력의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