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비고츠키의 생애와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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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어학 비고츠키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L. S. Vygotsky
1. 비고츠키의 생애
비고츠키의 생애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출생한 1896년부터 심리학자로 등장하게 되는 1924년이며, 두 번째는 1924년부터 1936년에 죽기까지 심리학자로서 열정을 다해 연구를 한 시기이다. 이렇듯 두 시기로 나누어 비고츠키의 생애를 알아본다.
⑴ 제1시기 : 출생부터 심리학자로 등장하기까지
그림 오르샤의 위치
비고츠키는 1896년 11월 17일 백러시아(현 벨로루시)의 오르샤(Orsha)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생후 1년 즈음엔 백러시아의 비교적 큰 마을인 고멜(Gomel)로 이주하여 아동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고멜은 아버지가 은행지점장으로 있던 곳이기도 하였는데, 그의 아버지는 카르고프의 우카이니안에 있는 상대를 졸업하고 고멜의 은행지점장으로 근무했다. 아버지의 성격은 엄격했고 냉소적이었지만 풍자적인 유머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이에 비해 어머니는 매우 자상한 성격이었다. 또한 비고츠키의 어머니는 교사교육을 받았지만 자녀들을 기르는 데 전념했다. 비고츠키 부모의 자녀들에 대한 배려는 각별했으며, 그들의 가정을 문화적이며 지적으로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가정에는 늘 부모의 따뜻한 격려와 활기넘치는 토론이 있었다고 한다.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많은 기회를 박탈당하기는 하였지만 가정적으로 행복했으며, 부모 덕분에 지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비고츠키는 공립학교에 가지 않고 몇 년 동안 가정교사 Ashpiz에게서 교육을 받았는데,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에 기초한 그의 교육방법은 비고츠키의 직관적 사고를 일깨우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유태인 고등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마쳤으며, 어린 시절 ‘꼬마교수’로 불릴 만큼 지적인 토론을 좋아하고, 친구들을 철학, 문학, 역사, 예술 과목의 요 주제들에 대한 토론으로 이끌었다고 한다. 가령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에 대해 토론할 때 스스로 모의 법정의 연출가로서 사상의 역사적 맥락을 탐구했다. 비고츠키는 다양한 분야(철학, 문학, 역사, 예술 등)를 두루 좋아하였고, 특히나 연극과 문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비고츠키는 어렸을 때 연극에 대해 생각하길 좋아했으며, 연극에 관한 글을 쓰곤 했다. 돕킨의 기록에 따르면 비고츠키는 문학 중에서도 시를 무척 좋아했으며, 특히 푸쉬킨과 하이네의 시를 좋아했다. 그러나 친구들이 푸쉬킨의 서정적인 시를 좋아했다면, 비고츠키는 비극적인 시를 좋아했고, 비극적 시집인 이탈리아 시들을 좋아했다. 꼬마교수로서의 경험은 전생애에 걸쳐 영향을 미쳤는데, 비고츠키의 동료 교수들은 비고츠키를 무한한 기억 용량을 가지고 있고, 대단히 빠른 속도로 엄청난 양의 독서를 하는 독서광으로 그리고 놀랄 정도로 많은 연구를 하는 학자로 표현한다.
그림 3 1934년도 모스크바 대학 중심의 마르크스-대로
그림 2 현 모스크바 대학의 모습
1913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금메달을 받고 김나지움을 졸업하지만 유태인에 대한 차별 때문에 대학을 선택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모스크바 대학은 유태인에 대해서 3%만 입학을 허가했던데다 더욱이 비고츠키가 입학할 무렵 3%마저도 무작위 추첨을 통해 극소수만 선발하여, 최상위의 성적임에도 불구하고 추첨을 통해 가까스로 입학하였다. 또한 전공 선택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는데, 의사라는 직업은 유태인으로서 조심스러운 직업이었으며, 제정 러시아의 공무원이나 변호사를 제외한 법률가도 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역사나 철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교사가 될 수 없었으며 결국 위험하지만 부모가 원하는 대로 모스크바 대학 의학부에 진학을 하였다. 그러나 한 달 후 비고츠키는 유태인에 대한 제약을 벗어날 수 있는 몇 안되는 직업 중 하나인 법률가가 되기 위해 법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모스크바 대학의 재학생이던 1914년에는 비공식 학교인 샤나브스키(Shanyavskii) 대학에도 다녀야 했는데, 교육부 장관이 반(反) 제정 운동에 대한 강경 조치로 다수의 교수와 학생들을 모스크바 대학에서 추방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당시의 샤나브스키 대학은 모스크바 대학보다 더 훌륭한 대학이 되어 버렸고, 비고츠키도 비록 학위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이 대학에서 자신이 원하던 심리학, 철학, 문학, 교육학 등의 분야에 대해 공부할 수 있었다. 1916년에는 학창 시절 『햄릿』을 읽고 감명을 받아 학생 신분으로서 첫 논문을 썼으며, 1917년에 다시 모스크바 대학으로 돌아와 법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졸업 후 비고츠키는 고향인 고멜에서 7년동안 문학과 심리학을 가르쳤으며, 미술학교에서 예술사와 미학뿐만 아니라 문학과 과학에 대한 강의도 하였다. 고멜 사범대학에서는 심리학 실험실을 만들었으며, 그곳에서 교육심리학의 토대가 된 강의를 시작하였다.『베라스크(Verask)』라는 문학 저널을 창간하였고 여기에 처음으로 문학 연구물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나중에 『예술심리학』으로 재발행되었다. 비고츠키는 러시아어, 독일어, 영어, 히브리어, 불어, 라틴어, 그리스어, 에스페란토어에 이르기까지 8개 국어를 할 수 있었으며, 이 때문에 미국을 비롯해 유럽 국가에서 나오던 주요 연구 업적들에 대해 폭넓은 독서를 할 수 있었다. 그의 업적은 심리학의 여러 영역과 또한 인접한 학문분야를 모두 아울렀다. 1920년 결핵이 나타나 대학 은사에게 자기가 죽은 후 자신이 수집한 원고들을 발간해 줄 것을 부탁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일시적으로 회복된 이후에는 계속하여 연구를 했다.
그림 비고츠키의 가족
⑵ 제2시기 : 심리학자로서 가장 생산적이었던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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