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공화정기 기사신분의 사회이동

 1  로마 공화정기 기사신분의 사회이동-1
 2  로마 공화정기 기사신분의 사회이동-2
 3  로마 공화정기 기사신분의 사회이동-3
 4  로마 공화정기 기사신분의 사회이동-4
 5  로마 공화정기 기사신분의 사회이동-5
 6  로마 공화정기 기사신분의 사회이동-6
 7  로마 공화정기 기사신분의 사회이동-7
 8  로마 공화정기 기사신분의 사회이동-8
 9  로마 공화정기 기사신분의 사회이동-9
 10  로마 공화정기 기사신분의 사회이동-10
 11  로마 공화정기 기사신분의 사회이동-11
 12  로마 공화정기 기사신분의 사회이동-12
 13  로마 공화정기 기사신분의 사회이동-13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로마 공화정기 기사신분의 사회이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로마 공화정기
기사신분의 사회이동
- 목차 -
Ⅰ. 머리말
Ⅱ. 로마 기사의 기원
Ⅲ. 정치적 상황에 따른 기사신분의 성장
Ⅳ. 기사신분의 성장 배경
Ⅴ. 기사신분의 신분으로서의 성격과 직업형성
Ⅵ. 사회이동과 그 의의
Ⅶ.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Ⅷ. 맺음말
Ⅰ. 머리말
공화정기의 기사신분의 대해서 알기 전에 일단 로마시대 기사의 뜻부터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기사는 중세 때 활동하던 직업 기마무사(騎馬武士)를 말하는데 중세에 활동한 기사들은 직업적인 기마전사들로서 일부는 영주에게서 봉토(封土)를 받고 군역(軍役)의무를 제공하던 봉신들이었으며 봉토를 받지 못한 기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제부터 살펴볼 기사는 고대 로마의 기사계급인 에퀴테스[equites]로, 라틴어로 말탄 사람이라는 뜻을 가리킨다. 고대 로마에서, 말을 타고 군무에 종사하던 사람을 가리키는 이 equites는 원래 기병대 병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가 이후에 정치적·행정적 계급으로서 기사신분을 나타내게 되었다. 원로원 의원 다음으로 로마의 가장 높은 재산 계급으로, 행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맡은 기사계층은 공화정 말기에는 20,000명 이상이었다. 여기에서는 로마 기사의 기원과 성장, 기사신분의 성격을 살펴보고 사회이동 양상과 그 의의를 제시하고자 한다.
Ⅱ. 로마 기사의 기원
로마 기사의 기원에 관해서 여러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이 귀족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하며,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 기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말을 탄 보병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몸젠(Th. Mommsen)에 의하면, 기병의 켄투리아는 본래 귀족으로만 구성되었다가 기원전 534년 세르비우스 왕의 개혁에 의해서 처음으로 평민에게 개방되었다고 한다. 초기 로마에서 에퀴테스는 원로원 계급에서 차출되었으며 에퀴테스 에쿠오 푸블리코(공공비용으로 말을 타는 기사)라고 불렀다. 이들은 코미티아 켄투리아라고 하는 의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세력이었다. 하지만 세르비우스 왕 이후 원로원 의원이 아닌 사람들도 기병대에 뽑혔으며 그들은 말을 자신이 조달했다(에퀴테스 에쿠오 프리바토). BC 1세기에 이르러 외국인 기병대가 그들을 대신해 전장에 나가는 추세가 나타나자 에퀴테스 신분은 장교직이나 장군의 참모직만 맡게 되었다. 이 무렵 에퀴테스는 원로원과 별개의 독자적인 계급이 되었다.
초기 로마에서 세르비우스가 군사개혁을 실시한 목적은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대외적으로는 로마의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기사의 구성원들은 세르비우스 이전에는 귀족들이었다. 그러나 군사개혁으로 귀족뿐만 아니라 평민에게도 기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이들은 일정한 액수 이상의 재산을 갖고 건강한 신체를 가진 평민 중에서 감찰관에 의해 선출되었다. 세르비우스 왕은 자신의 세력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평민 중에서 부유한 자들에게 군사적인 의무를 부여함으로써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었다.
Ⅲ. 정치적 상황에 따른 기사신분의 성장
1. 포에니 전쟁기 기사신분의 성장
로마의 팽창과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일 것이다. 이 전쟁의 결과 로마는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고 수많은 속주를 갖게 되었고, 복속된 속주들이 기사신분의 상업금융활동의 무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포에니 전쟁을 전후로 하여 로마에서는 이탈리아의 영토통일과 속주의 확장 등 영토적 확장이 이루어졌으며 기사신분의 직업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2차 포에니 전쟁기(B.C. 218-201) 이후 로마군내에는 로마군단의 기사들은 점차 없어지고 동맹국 및 용병 기사로 채워졌다. 로마의 기사는 처음부터 군사적으로 중요성이 별로 크지 않았으며 후에는 본래 가졌던 군사적 역할마저도 상실하여 단지 사회적인 신분을 지칭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변화된 의미를 지니게 된 로마기사들은 로마의 팽창으로 지중해의 주도권이 로마에 의해서 장악된 것과 궤를 같이 하여 성장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군대에 공급함으로써 이익을 얻게 되었고, 이를 다시 토지에 투자하거나 금융업에 진출하면서 기반을 다져 나갔으며, 이 가운데서 기사신분을 형성하는 자들이 배출되었다.
1) 전쟁의 수행
일반적으로 기사를 언급할 경우 병제와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로마 군사력의 주력이 보병이었고 당연히 전술 또한 보병위주의 전술이었기에 기병들은 전투에 있어서 전령, 추격 등의 제한적인 역할만을 담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2차 포에니 전쟁 기간중 한니발에 의한 다수기병을 이용한 포위 섬멸 전술과 코끼리를 이용한 돌파 전술에 의해 보병에 치우친 로마의 전술은 한계를 들어내었다. 이 당시 보병과 기병의 비율로 보아 로마 기병의 군사적 중요성이 별로 크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