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문 내가 처음 만났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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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간증문 내가 처음 만났던 하나님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내가 처음 만난 하나님
내가 처음 만났던 하나님
프롤로그
자신의 삶에 대한 기술이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존재가 본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그 주관과 오해 역시 하나님의 존재 어딘가에 닿아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사실 신학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하나님에 대해 초자연적이라든지 혹은 내재적이라든지 하는 논의가 과연 가능한 것인가 생각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서구에서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하나님에 대한 계몽주의적 도전들을 이제 와서 한국식 신학이라는 명목으로 배우고 있는 것에 대해 회의도 있었다. 어찌됐건 그네들은 역사와 시대의 도전 앞에 응전하면서 그들의 사상을 정립해 나갔던 것이 아닌가. 사회의 발전이건 사상의 흐름이건 전 세계의 패권을 주도했던 서구인들의 역사를 단시간에 뒤쫓아가고는 있지만 그 이유로, 한 사회 안에 여러 세대 -사상과 가치관에 있어서까지- 가 농축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은 신학함에 있어서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내게 있어 끊임없이 사유하고 회의하기를 요구하는 신학작업이 단순히 즐겁지만은 않았던 것은 서양 사상의 흐름이 분명히 체감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분명한 보편성이 있다. 나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적 특수성이 신학 (하나님 이해)을 보다 깊이 있게 통찰하기 위해 빌려오는 수많은 신학자들의 토양과 사뭇 다르다 할지라도 사람은 하나님 문제에 관한 저서를 접할 때 자기 자신을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이 최초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작업을 해석한데 불과한 경우에서조차도 인격으로서 그 자신의 존재는 개입될 수밖에 없다. 또한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험이 필수적으로 수반된다. 이러한 생각들이 바로 내가 나의 신론을 , 내가 만났던 하나님을 서술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 주었다.
우주의 심판관이신 하나님
내가 1980-90년대 거의 20여년 동안 신앙생활을 한 곳은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교단에 속한 부산의 온천중앙교회라는 곳이었다. 여기서 나는 하나님을 만났고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다. 내가 살았던 동네는 부산에서도 유명한 ‘온천장’이라는 유흥가였다. 온천이 나는 곳이라 관광지로서 일찍이 개발이 되었으나 주로 퇴폐영업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온천장이라 이름도 박정희 정권 시대에 유명한 요정집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요정집은 우리 교회 바로 옆에 있었는데 1980년대에는 커다란 한정식 집으로 바뀌었다. 카바레며 사창가, 목욕탕, 영화관, 상점들로 빼곡이 늘어서 있는 그 곳에서 우리 교회는 90년이 넘도록 온천장을 지킨 터주대감이었다. 사리 분별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부터 교회는 내게 있어 피난처이자 거룩한 보루였다. 밤이 되면 네온싸인과 조명으로 더욱 활기를 띠는 그 곳에서 나는 ‘어둡고 험한’ 세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도로변에서 진한 화장과 야한 옷차림을 하고 코 맹맹한 소리로 남자손님을 부르는 매춘 여성을 보면서 성경 속의 창녀를 어렵잖게 상상할 수 있었다. 교회는 나를 성결하게 지켜주는 거룩한 성소였고 하나님은 거룩하고 존귀한 분으로 내게 다가왔다. 우리 교회의 예배에 대한 기억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동네를 위한 기도와 성가대의 찬양이었다. 나이 지긋한 장로님 -아직도 그 분의 존함과 모습을 생생히 기억할 수 있다- 중 한 분은 우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기도하시곤 했다.
“ 거룩하시고 존귀하시고 찬양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우리의 머리털 하나도 세신 바 되시는 전지하신... 이 소돔과 고모라 같은 온천장 일대에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가 전파되게 하옵시고...”
나는 정말이지 이 소돔과 고모라 같은 온천장에 살고 있는 것이 싫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분이셨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어둡고 무서운 곳이었다. 그 당시 하나님을 연상할 때면 나는 새하얀 빛을 생각하곤 했다. 그 이미지를 연상하고 기도해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같았고 내 죄도 씻겨지는 것만 같았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가. 여름 성경학교 프로그램 중에 천로역정이라는 순서가 있었다. 교회 곳곳에 불빛을 달리한 여러 방들을 만들어 놓고 각각의 방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천성에 도착하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유혹을 통과하면 선생님들이 우리들에게 금빛 카드를 주었는데 빛나는 카드를 손에 쥐었을 때의 뿌듯함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주인공이 등에 무거운 짐(죄)을 지고, 손에는 한 권의 책(성서)을 들고 고향인 ‘멸망의 도시’를 떠나 도중에 여러 인물들을 만나며, ‘낙담의 늪’, ‘죽음의 계곡’, ‘허영의 거리’를 지나서 천신만고 끝에 ‘하늘의 도시’에 당도하는 것처럼 나에게 있어 세상은 떠나야만 할 어둡고 캄캄한 곳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로 가득한 세상을 그의 의로움으로 심판하실 우주의 재판관이었다.
삐아제의 5단계 성장발달론을 잠시 빌려오자면, 아동기는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사고가 가능해지며 구원론적인 입장보다는 도덕적인 선악의 윤리적 측면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자신도 선해지기 위한 도덕적 노력들을 추구하는 시기이다. 온천장과 교회, 사람과 하나님. 나는 이렇게 다소 극명한 선악의 판가름을 하게 되었다. 나는 절대 선이신 하나님에 대해 어떤 깊은 경외심을 갖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있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초월적 개념은 절대 권능으로 받아들여졌고 때문에 나는 성경의 많은 부분 특히 구약에 나타난 사건을 분명한 실재로 받아들였다. 하나님은 언젠가 심판 날 때에 선악을 분별하실 것이다. 나를 둘러싼 세상의 죄악과 어두움은 그 앞에 종결될 것이다. 그 분은 내게 정의와 권능의 하나님이셨다.
성결한 하나님
내가 주일학교(중고등부)를 다녔을 당시, 공과교재는 “성결한 삶”이었다. 성결교회의 4대 신조는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이었는데 자주 등장하는 성경퀴즈의 문제이기도 했다. 성결이라는 것은 개혁교회의 성화의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개혁교회는 객관적이고 법적인 상태의 변화인 칭의와 이에 대해 주관적으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가리키는 성화를 말함으로써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였다. 즉 하나의 구원이라는 사건을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칭의와 성화를 나눈 것이다. 반면에 웨슬레안에 의하면 성화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이후에 새 생명이 성장하여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을 뜻하며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성숙 내지는 완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웨슬레안은 내적인 변화를 초기단계와 후기단계로 구별하기 때문에 중생 다음에 성화의 단계가 별도로 와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개혁주의에서는 칭의와 함께 성화가 시작하며 이 성화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계속해서 성장해 갈 뿐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성화 이해의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사실 성화(sanctification)와 성결(holiness)은 거의 동일한 의미이나 약간의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성화가 성결에 이르는 과정을 포함하는 개념이라면 성결은 성화를 이룩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성결하신 분이지 하나님이 성화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성화할 수가 없다. 본래부터 성결하다. 그러나 인간은 성화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성결하기 위하여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개혁교회는 지상에서의 완전한 성화를 부인하고 성화되는 과정을 강조하기 때문에 성결보다는 성화를 선호하는 반면에 웨슬레안은 지상에서 완전한 성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성결을 선호하게 된다고 본다. 후크마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가리켜 우리는 성화라고 한다"라고 정의하였다. 벌코프는 "성령의 자비로우시고 끊임없는 역사로 죄의 부패에서 죄인의 전 성품을 정결케 하여 줌으로써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요한 웨슬레에 의하면 온전한 성화는 신자가 다시 자기의 무능과 자기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를 깨닫고 믿음으로 받는 신앙체험으로서 이 순간적인 체험을 통해서 신자는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부터 씻김을 받으며 사랑과 봉사에 더욱 큰 힘을 얻어 승리하는 생활의 계기가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웨슬레가 말하는 순간적인 체험이라는 것은 오늘날의 성령 체험 혹은 성령의 임재의 개념이다. 나는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 성령의 순간적 체험 곧 성령의 임재를 간구해야 한다고 믿었다.
불같은 성령 임하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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