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성과 탈근대성의 역사사회학 - 신체의 정치 - 주권체의 세속화

 1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역사사회학 - 신체의 정치 - 주권체의 세속화-1
 2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역사사회학 - 신체의 정치 - 주권체의 세속화-2
 3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역사사회학 - 신체의 정치 - 주권체의 세속화-3
 4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역사사회학 - 신체의 정치 - 주권체의 세속화-4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역사사회학 - 신체의 정치 - 주권체의 세속화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역사사회학
-신체의 정치 : 주권체의 세속화-
○ 머리말
본 글은 신체에 관한 정치적 인간학과 통치체(the body politic)의 사회학을 개념적으로 연계해 보고자 쓰인 것으로 이는 막스 베버의 합리화 패러다임으로부터 기인하였다.
민주주의적 지배와 전체주의적 지배 양자 모두에서 지도자의 신체는 사회적 권력을 표현하는 하나의 기호이며 이는 곧, 인간의 신체가 정치행위를 상징하는 일종의 메타포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뜻한다. 서구세계에서는 민주주의체제를 통해 왕의 신체로부터 국민의 신체로 권력의 상징적 전화가 진행돼 왔으며 이 과정에서 왕관이나 홀같이 표장을 통해 상징화되던 권력은, 이것이 보다 추상적인 지역이나 집합체 속으로 확산됨에 따라 덜 구체적이고 덜 특정화된 형태를 띠게 됐다. 즉 권력은 상징적 힘이 결여된 복잡하고 익명적인 지위나 제도의 집합체 속으로 이전됐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권력의 확산과정은 왕의 신체가 가지는 성스러운 권위가 권력의 추상적 도구로서 국가의 세속적 권위로 대체되는 주권의 세속화를 수반하였으며, 이러한 세속화과정은 결과적으로 입헌정치 출현을 가능하게 하여 오늘날의 시민권 개념이 출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 폴리스에서 국민으로
철학자에서 신학자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신체는 통일성, 균형, 안정 등을 상징하는 메타포의 영역으로 인지돼 왔으며, 동시에 인간신체의 균형이 정치생활의 균형에 관한 메타포를 제공한다고 바라보았다. 때문에 정치제도의 혼란은 인간신체에 질병을 유발한다고 생각했다 서구 최초의 정치과학으로 간주할 수 있는 영양학은 전체적인 생활을 관장하는 관리체계를 의미했으며 동양의 침술요법 역시도 같은 의미에서 국가의 건강이 신체건강에 대한 하나의 모델이라는 생각으로 발전되어 왔다. 즉 침술요법이 인간신체 내에서 물질의 흐름을 돕는 역할을 했던 것처럼 국가의 현명한 정치적 조정이 통치체의 건강성을 회복시킨다고 생각했다.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역사사회학, 207쪽)
. 따라서 서구역사에서 의학은 항상 통치의 기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특히, 속세와 격리된 초기기독교의 수도사들은 식이요법, 성적 금욕주의, 그리고 사회질서간의 밀접한 관계를 잘 인식하여 욕망의 규제가 곧 질서 있는 공동체의 전제조건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은 기독교교리의 본질적인 특징으로서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신체는 고대 및 초기근대의 통치이론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교회와 신의 관계를 축으로 한 신학적 사고의 발전에도 신체의 메타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독교교리에 의하면 사람들은 신비적인 그리스도의 신체와 일체가 되게 하는 성례체계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결되며, 이른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이 과정의 매개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주제는 어거스틴(Augustine)의 ‘신의 왕국(Civitas Dei)이라는 개념을 통해 면밀히 관찰가능하다(이에 따르면, 기독교사회는 질서있고 통일적이며 통합된 모습으로 묘사되지만 이에 반해 정치사회는 분열적이며 임의적이고 갈등적인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또, 고대 기독교회의 여러 의식이 정치적 연대의식을 확인하는 공공축제의 고전적 모델을 제공했다는 시각은 서양철학의 체계 속으로 흡수되는데, 그 결과 사회철학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교회와 같은 종교 조직체의 통일성문제가 사회적 연대의 궁극적 기반으로, 일종의 의식적 실천이론을 구성하게 됐다.
사회학은 이미 그 자체가 이러한 정치적 분석의 전통을 수용하고 발전시킨 결과였으며 이를테면, 윌리엄 스미스(William Robertson Smith)의 ‘유대종교 강론’등을 통해서 공공의 의식(儀式)이 사회적 응집의 조건이라는 이론적 논의의 기반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공공의 축제, 그 중에서도 함께 하는 식사는 사회적. 정치적 생활에 긴밀한 유대를 제공해 주며, 따라서 그 속에 내포된 종교적 희생의 성격은 도시생활을 재생산하는 데 필수적인 기능적 요구이기도 했다.
이에 반해 베버는 기독교의 정치적 연대의식에 내재된 혁명적 성격이 일련의 성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정치생활의 유대란 혈연, 인종, 의식적 관행보다 종교적 신념을 같이하고 있다는 공유의 관념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베버에게 믿음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기독교적 관념은 지역적인 친족공동체의 구속에서 해방된 사회정치적 행위자로서 근대적 시민개념이 장기에 걸쳐 출현하게 되는 중요한 하나의 전제조건이었다.
왕권에 관하여 울만(Walter Ullmann)은 기본적으로 두 개의 경쟁적 권력이론이 중세에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먼저 권력 하강이론(the descending theory of power)은 왕의 권위가 신과 성스러운 힘으로부터 아래로 부여됐기 때문에 왕의 주권은 보다 낮은 명령의 지지나 수용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으로 이에 따라 7,8세기부터 왕들은 스스로를 국민에게서 분리시키려고 했으며, 공동체 위에 군림하되 공동체에는 직접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을 권리, 즉 신의 대리자로서 국민을 통치할 수 있는 신정권을 강력히 주장했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왕은 자신의 신체가 기적과 병치료의 마술적인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로부터 신비로운 왕의 신체라는 생각은 지속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