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답사기 - 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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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답사기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 20@@년 9월은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국방의 의무를 하기 위해 군에 입대했던 해라 그 달에 가기로 한 답사를 갈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 나에게 훈련소에서 온 동기들의 편지는 학술답사 동안 있었던 재밌었던 일이라든가 갖가지 웃음을 짓게 하는 사건 사고를 소개가 주를 이루었고, 문학답사의 산 증거인 사진을 첨부하여 더욱 나를 부럽게 만들었다. 갓 훈련소에 들어온 나에게 그 편지는 위로의 편지이기 보다는 부러움과 이곳을 벗어나 그들과 같이 하고 싶은 욕망에 나를 휩싸이게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과 함께 할 수는 없지만 3년 뒤인 2004년엔 싱그러운 새내기 후배와 함께 답사를 가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나도 군 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전역을 하고 1학기동안 과를 돌아보니 단결국어과 답지 않은 모습이 종종 보였는데, 그중 임간학교가 없어진 것이 그 예이다. 비록 아쉽기는 하지만 그 명맥을 학술답사가 이어간다니 그나마 다행인 일이다. 2학년만 가는 답사의 전통이 없어진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3년 동안 기다려온 답사를 기다리는 내 마음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온 답사이라 그런지, 소풍가기 전날 잠을 설친 초등학생처럼, 잠이 오지 않아 다음날 8시까지 가려면 일찍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에 오히려 잠을 더 설치기도 하고, 답사가 얼마나 재밌고 고등학교 다닐 때 문학교과서에 보았던 송강 정철과 같은 유명한 옛 문인의 작품이 쓰인 본 고장을 가 본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느새 잠이 들었다.
- 9월 15일 수요일
잠을 늦게 자서인지 평소보다 일어나기가 어려웠지만 답사를 가야한다는 일념으로 학교로 출발하였다. 사대로비에는 이미 답사 갈 사람들도 가득 차 있었고, 모두들 들떠있는지 아니면 내가 들떠 있어 그렇게 보였는지, 잠시도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계획한데로 8시가 조금 넘어 모두 버스를 타고 전라도를 향해 출발하였다. 오랜만에 많은 국어과 사람들이 가는지라 2대 버스가 꽉 차서 1명씩 돌아가며 운전석의 옆에 있는 조수석과 뒤 칸에 간이 의자를 타고 가는 이도 있었다. 하늘도 국어과 답사를 알았는지 가을다운 높고 푸른 하늘이었으며 그런 날씨 덕에 가벼운 마음으로 답사를 떠날 수 있었다. 88고속도로를 타고 대구에서 약 4시간 정도가 지나자 전라북도 남원에 위치한 광한루에 도착했다.
광한루는 춘향이가 그네를 타다 이몽룡이 그 모습을 보고 한 눈에 반해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게 되는 중요한 장소가 아니던가. 광한루에는 볼거리가 많았다. 우선, 춘향이를 기리는 절이 있었는데 초상화를 걸어두어 관광 객들이 한번씩 인사를 할 수 있게 하였다. 광한루하면 춘향이가 그네 탔던 곳으로만 알았는데 그것 보다는 광한루 중심을 흐르는 연못이 더 유명하고 운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이런 운치 있는 곳이 그 당시 선남선녀들의 데이트 장소로 유용했으리라. 지금도 신혼부부들의 신혼여행 장소나 연인들의 여행 장소로 손색이 없어 보였고, 특히 광한루 앞에 있는 돌로 만든 오작교는 부부가 1년에 한번씩 이곳을 밟으면 금실이 좋아진다는 얘기를 듣고 다음에 결혼해서 아내를 데리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광한루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고 다음 장소인 가사 유적지라 불리는 전라남도 담양으로 향했다.
담양에 도착하니 넓은 들판이 펼쳐졌고 그 들판 뒤로는 듬직한 맏형 같은 산이 줄 곧 보였는데 전라도의 힘의 원천인 무등산이었다. 담양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간 곳은 로 유명한 조선 중종의 문인 송순이 지은 정자인 면양정이었다. 면양정은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 있어 계단을 꽤 올라서 보니 1평 조금 넘는 크기로 된 방과 그 옆에 오래되 보이는 소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내 발밑으로는 넓은 들판과 논이 보였고 앞에 보이는 것은 전라도의 힘인 무등산이 보여, 송순이 이곳에 있으면서 근심걱정 없이 책 읽기와 글쓰기에 전념할 수 있었던 거 같다. 실제로 송순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고 한다.
다음 목적지는 전라남도기념물 제1호 지정된 송강정이었다. 송강정은 환벽당, 식영정과 함께 정송강 유적이라 불린다. 정철이 유배 생활을 시작한 이곳에 머물면서 식영정을 오가며 과 을 비롯하여 많은 시가와 가사를 지었다고 한다. 정각 바로 앞에는 시비가 있었는데 고등학교 때 점수 1점을 더 따기 위해 배웠던 것을 직접 이곳에 와 읽어보니 그 당시 정철의 임금을 향한 마음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정자 주위로는 아주 오래된 소나무가 보였는데 적어도 500년 정도는 되 보였다. 사람 두 세 사람의 팔이 필요해 보였는데 이 정자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송강정을 간 뒤 우리는 식영정으로 향했다. 식영정(息影亭 )은 서하당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하는데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인데 가히 그곳을 그림자가 쉬고 있었다. 식영정 앞으로는 예전에는 목동이 소를 몰고 와 물을 먹이고 아낙네들은 빨래를 몽둥이질 하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는 개울이 흘렀고, 정철이 김성원과 함께 노닐던 자미탄, 노자암, 견로암, 방초주, 조대, 서석대등 경치가 뛰어난 곳이 여러 곳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하지만 정자 주위를 흐르는 광주호와 많은 노송들과 풀들, 이름모를 들꽃들 피어있어 식영정이란 이름답게 ‘그림자도 쉬어 가는 정자’라 할만 했다. 옛 문인들이 이런 멋진 풍경속에 묻혀 지내며 유유자적 글짓기를 즐겼으니 각박한 세상사에 찌는 삶을 살아가는 내 모습이 조금은 초라해 보이기도 하고 여유로운 삶을 산 정철이 부러웠다. 식영정을 내려와 원래 일정데로라면 가사 문학관을 갔어야 했는데, 교수님의 강력한 권유로 환벽당도 10분정도 걸어서 가게 되었다. 환벽당은 조선 중기의 문신 김윤제가 후학을 가르치던 정자로 선생님 말씀에 들어가는 문이 낮아 평소 수업 시간에 말을 안 듣는 학생은 머리를 부딪힐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그러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악’하는 소리가 들려 폭소를 자아냈다. 환벽당에 올라가니 꽈리류로 보이는 분홍빛 꽃이 있어 신비로워 보였다. 정자라는 곳이 휴식처라 그런지 대청에 앉아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환벽당을 내려와 가사문학관으로 향했는데, 전국에 하나 밖에 없는 가사 문학관에는 목동이 피리를 부는 조각상이 보여 가사와 시가를 즐긴 이 곳 사람들의 옛 모습을 엿 볼 수 있었다. 가사에 관한 여러 자료와 영상물 시청을 보며 가사에 관해 100권의 책을 읽는 거 보다 이곳에 와서 눈으로 한번 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느꼈다.
첫날의 마지막 목적지는 최근 다모폐인이란 신조어를 탄생시킨 드라마 ‘다모’의 촬영장소로 유명한 소쇄원을 갔다. 소쇄원은 우리나라의 원림 (苑 林)을 대표하는 곳으로 도로변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소쇄원에 들어가는 길은 양 옆으로 울창한 대나무가 솟아 있어 시원하고 기세 있어 보였다. 이 울창한 숲길은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라 더욱 관심을 끌게 했고, 이러한 유명세가 그냥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소쇄원을 들어가는 대나무 숲길을 지나 안쪽을 들어가니 소쇄원을 둘러싸고 있는 담벼락을 따라 앞쪽에는 光風閣이란 누각이 보였고, 그 뒤로 霽月堂당이 보였다. 그리고 소쇄원 가운데를 흐르는 계곡은 자연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해 요즘처럼 골프장을 짓기 위해 멀쩡한 산을 민둥산을 만드는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자연친화적인 모습을 엿 볼 수 있었다. 광풍각에는 소쇄원을 사모하는 사람들, 일명 소사모라는 인터넷 카페 주소도 적혀있어 이곳이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전국적으로 유명한 곳임을 알 수 있었다. 광풍각의 문은 여름이라 그런지 모두 위쪽으로 올려 붙여 놓았는데 그 곳에 들어가 보니 에어콘이 따로 없어도 우리 조상들이 여름 지내는데 별 어려움 없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소쇄원을 보면서 붕당정치나 사리사욕을 따졌으리라는 양반에 대한 고정관념에 벗어나 자연과 어우러져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운 조선시대 선비들의 기개를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