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감상문 바다의 도시 이야기

 1  독서 감상문 바다의 도시 이야기-1
 2  독서 감상문 바다의 도시 이야기-2
 3  독서 감상문 바다의 도시 이야기-3
 4  독서 감상문 바다의 도시 이야기-4
 5  독서 감상문 바다의 도시 이야기-5
 6  독서 감상문 바다의 도시 이야기-6
 7  독서 감상문 바다의 도시 이야기-7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 레포트 > 독후감
  • 2015.03.29
  • 7페이지 / hwp
  • 1,000원
  • 30원 (구매자료 3% 적립)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독서 감상문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바다의 도시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대해 칭찬 일색이다. 그러나 이렇게 작고 천연자원도 부족한 나라가 1천년을 버텼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무언가 남다른 나라였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우선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를 살펴보자. 베네치아 공화국은 567년 이민족에 쫓긴 롬바르디아 피난민이 만 기슭에 마을을 만듦으로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썰물 때 군데군데 노출 되어있던 개펄 지대에 자리를 잡게 된다. 시오노 나나미의 표현은 신의 계시로 이곳에 살게 되었다는 전설이라도 만들지 않았더라면, 높은 문명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 살기 힘든 땅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목숨을 살릴 수는 있었으나 말 그대로 배수진을 친 것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처음에는 비잔틴의 지배를 받으며 해상무역의 본거지로 급속히 성장하였다. 7세기 말에는 무역 중심지로 도시공화제라는 체제 하에 독립적 특권을 행사하였고, 10세기 말에는 동부 지중해 지역과 무역으로 얻은 경제적 번영으로 제네바, 피사 등과 함께 자유 도시들 중 가장 부강한 도시로 성장했다. 4차 십자군 원정에서 동방 해상 고속도로를 완성함으로서 동방무역을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막대한 부를 형성하게 되었고, 14~15세기에 전성기를 맞게 된다. 16세기에 터키 인들에 의해 동부 지중해에서의 세력이 약해지고 도시 경제가 쇠퇴하고 페스트의 발병으로 국가의 힘을 잃게 되어, 1797년 나폴레옹 1세에 의해 점령당하게 됨으로서 베네치아 공화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모토는 "합리성, 경제성, 효율성 " 이다. 시오노 나나미에 의하면 지리적 환경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개펄지대에 만들어진 나라이다. 썰물 때 물이 잘 빠져나가지 않아도 금새 침수되어 버리는 지역이었다. 농토로 쓸 땅은 손바닥만큼도 없었다. 뒤에 산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목재로 쓸 나무도 풍부하지 없었다. 그들이 생산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생선과 소금 뿐 이었고, 주식인 밀조차 자급자족하지 못했다. 인적자원 역시 양적으로는 부족한 상황이었다. 하루 배를 채울 밀조차 풍족히 없는 현실에서 그들은 교환 밖에는 살 방도가 없었고, 그들이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은 오로지 바다 뿐 이었다. 교환이라 함은 서로 동등한 가치를 가진 물건을 바꾸는 행위이다. 그러나 베네치아 공화국은 교환할 물건조차 없었다. 땅에서 금이 나는 것도, 옥이나 유색 보석들이 나는 것도, 아니면 가축을 쳐서 가죽을 만들어 낼 수 도 없었다. 그들은 멀리 타지로 나가 물건을 떼어와 수요가 있는 곳에 파는 장사를 주업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일을 하기에는 그들의 입지는 썩 괜찮은 곳에 있었다. 아드리아 해 끝쪽에 머물러 유럽에 속하였으나 멀리 아드리아 해 바깥으로 나가면 이집트와 같은 동방 물자가 집산되는 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환경을 바탕으로 베네치아인들은 공화국의 생존을 위해 경제 정치 사상적으로 어떠한 방식을 취했는가?
베네치아 공화국은 현실주의자에 합리성, 효율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른 육지형 국가들은 한 두 번의 정책상 실수라 해도 그것을 만회할 백그라운드가 있었지만, 베네치아 같은 최소한의 자급자족도 안 되는 국가에서는 정책상의 낭비와 실수는 치명적이었다. 국가 경영에 있어 경제적으로 최대 효율을 내는 방법은 기업이 내외부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하나의 목표를 향해 돌진할 수 있고, 중복 투자가 되지 않아 낭비를 줄일 수 있다. 우선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내부 집단 간의 분쟁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이데올로기가 판을 치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소수의 사상적 영웅을 탄생시켜 민중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그들이 큰 세력이 되어 국가를 좌지우지할 우려가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집단의 단결력, 애국심이 가장 중요하다. 집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경향도 적지 않게 가지고 있어야 한다. 외부적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가 돌아가는 것을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조율하는 기관이 있어야 된다. 그래야만 방향설정이 정확히 되고, 서로간의 중복투자로 인한 낭비를 줄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런 조율기관에 너무 많은 권력을 부여하게 되면, 정권을 잡아 군주제로 전략하고 효율성과 반대되는 세습제와 독재 같은 체제로 변모하게 된다. 그렇게 때문에 최고 기관에는 국가의 일을 효율적으로 조율, 간섭할 정책적 힘은 주되, 큰 권력은 내어주지 않아야 했다.
베네치아공화국은 우선 정책적으로 주민들의 해외 무역업 종사를 최대 지원해주었다. 베네치아는 콜레간차 라는 합자 투자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첫째는 자본가가 전 자본의 2/3을 대고 경영자(선원 겸 상인)가 나머지를 출자하는 방식이다. 두 번째 방식은 자본가가 전액 출자하고 항해가 끝난 뒤 이익의 3/4를 자본가가 나머지를 경영자가 나누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경영자는 이익의 1/4밖에 갖지 못한다. 그러나 이들은 한번에 여러 자본가들과 같이 계약을 맺어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제도는 경영자는 무자본으로도 사업을 시작할 수 있고, 복수의 자본가와 연대함으로 많은 이익을 놀릴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자본가도 분산 투자로서 위험을 분산시키고 제각기 다른 곳 떠나는 배에 다른 물품에 분산 투자를 함으로서 다각 경영을 이뤄낼 수 있었다. 또한 베네치아 공화국은 독점을 엄금하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중소 상인들을 보호하는 정책을 썼으며 , 이를 어길 경우 많은 벌금을 내렸다. 그들의 소속 영토에서 반란 등 국가 경제적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일이 일어나면 즉시 처벌을 가했다.
종교적으로는 카톨릭 숭배였으나 교황권의 권력을 약화시킨다. 그래서 교황의 세력이 정치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았다. 또한 성 마르코의 유품 같은 성스러운 물건을 각지로부터 가져와 전시 했다. 이는 민중들의 믿음을 한 층 더 강화 시켰다. 또한 이러한 성스러운 물건들이 자신들을 면죄 시켜준다는 믿음이 강해진 만큼 특정 사제나 주교를 따르는 일은 적어졌다. 그래서 베네치아 공화국에는 정치권력을 장악하거나 민중들을 선동한 종교인이 나오지 않았다. 이는 내부 분열을 막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기본적으로 종교보다 자신들의 경제적 이윤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교황의 이교도와의 무역 금지령에도 이를 어겼으며, 자주 파문당했으나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파, 교황파와 같은 정치색을 띄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치색을 강력하게 띌 경우, 반대 나라들과의 교역에 차질이 생긴다. 또한 이 정치색 이라는 것으로 인해 결국 대의명분이라는 하찮은 것들을 위한 전쟁을 자주 하게 된다. 전쟁은 경제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히기 때문에 베네치아 공화국처럼 자원이 풍부하지 않은 나라로서는 피할 수 밖에 없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에서의 내부 분쟁은 천년이란 역사동안 오로지 두 번 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그만큼 국가가 하나로 단결되어있었고, 갈등이나 차별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네치아 공화국 정부는 각 상인들의 무역활동에 대한 규제가 엄격했다. 화물 운반법이나 무역법 , 독과점 금지 법 등이 있었고, 이를 어길 경우 많은 액수의 벌금이 가해졌다. 이렇게 정부의 간섭이 심한 나라는 자연스럽게 정부의 크기와 힘이 강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정체 자체가 일개인이나 일가족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극도로 막도록 되어있었고 한 기관만이 강대한 권력을 휘두르는 일이 없도록 배려되어있었다. 국가의 원수 직은 선출에 의해 뽑혀졌고 종신제 였다. 원수를 보좌 감시하는 6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원로원은 외정을 주로 담당하며 재정을 담당하는 40인 위원회와 서로 견제를 했다. 원수 이외의 직책은 전부 복수의 인원으로 구성되고 원수라도 보좌관과의 협의 없이는 회의 소집조차 결정할 수 없었다. 베네치아는 합의제가 정치 구석구석이 스며들어 권력의 독점과 오용을 막는 시스템으로 되어있었다. 또한 베네치아에는 계층간의 갈등이 없었다. 귀족계층이 있긴 했지만 이들은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었을 뿐 특권은 없었다. 다시 말해서 귀족층은 토지의 소유자도 아니고 신하에 대한 재판권이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귀족과 평민 사이에 명확한 자산의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국정을 담당하는 자를 가리키는 지칭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유층에게는 국채를 강매하여 과세를 물게 함으로서 위화감을 없애고자 하였고, 부유층도 귀족부터 일반 서민까지 골고루 분포되어있었다. 다시 말해 부의 분배가 특정 계층에 편중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직업에 귀천이 심하지 않아서 그들은 각기 자신들의 직업을 자랑스러워하여 각 직업 단체마다 성스러운 유물과 성자를 하나씩 지정하고 축제를 통해 서로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기간을 가졌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4차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국가 발전의 기틀을 잡게 된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해양에 고속도로를 만들었다. 아드리아 해 동쪽 면을 지나 항해의 중요 지점마다 베네치아 령을 만들거나 좋은 우호관계를 맺었다. 4차 십자군전쟁에 참가해서는 콘스탄티 노플에 라틴제국을 세워 베네치아 인들이 자유롭고 비교 우위를 가진 교역을 하도록 도왔다. 원할한 교역을 위해 ‘무타‘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베네치아령인 해양선을 따라서 정해진 곳에서 정기적으로 쉬며 떠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항상 상선 옆에 군함이 몇 대씩 따라다녔고, 화물 운송법이나, 재해로 인한 피해보상법을 발전시켰다. 다시 말해 안전과 규칙 바른 교역을 통상의 모토로 내 걸었다. 그리하여 교역하는 다른 나라들이 믿음과 확신을 갖게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베네치아는 국제적인 무역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