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탱 게르의 귀향 - 민초가 부대에 오른 한편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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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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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마르탱 게르의 귀향》 : 민초가 부대에 오른 한편의 비극
사실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라는 제목은 나의 흥미를 그다지 유발하는 것은 아니었다. 강의 자체가 사회사 수업이니만큼 분명 역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마르탱 게르’라는 이름은, 아니 그 비슷한 이름조차도 도무지 들어본 기억이 나지 않았다. 스스로를 나름 역사에 관심을 갖고 살아온 ‘지식인’(?)이라 자부했지만 이 제목에서는 이야기에 대한 그 어떤 단서도 얻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책의 출판에 앞서 제작된 영화를 수업 자투리 시간에 잠시나마 감상하는 기회를 갖게 되고 나서야 이 이야기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 알게 되었다. 마르탱 게르의 귀향은 위대한 성군이나 잔악한 폭군의 이야기도 아니고 영웅들의 대담무쌍한 전쟁모험도 아니다. 궁중의 암투나 경국지색의 자태 같은 것은 더더욱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이야기는 16세기 프랑스 인구의 절대 다수를 구성하던, 하지만 자신들의 이야기를 좀처럼 역사에 남기지 못했던 농민층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후대에 그럴듯하게 꾸며진 소설처럼 보이는 마르탱 게르의 귀향에 관한 이야기는 놀랍게도 분명히 실재했던 사건이다. 이 이야기가 농민들 사이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전해질 수 있는 것은 ‘기록’을 남길 수 있는 ‘높으신 어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할 만큼 괴이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실화라고는 도무지 믿기 어려운, 오늘날 평가해도 다소 충격적인 이 사건은 당시 이 사건을 둘러싼 재판과 거기에 참여한 판사들의 기록을 통해 시공을 뛰어넘어 우리 앞에 재연되는 듯 하다. 이 희극 같은 비극은 당대 프랑스 농민들의 물질과 관념의 영역을 심도 있게 비추며 민중사적으로도 훌륭한 탐구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야기는 바스크 출신의 부유한 농민인 상시 게르와 그 식솔들이 아르티가라는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된다. 새로운 이주지에서 상시의 아들 마르탱은 집안의 경제적 이해에 따라 본인의 의사와 무관한 조혼을 하게 되지만, 칼싸움과 곡예를 좋아하던 모험심 많은 소년에게 부부관계와 농촌생활은 무의미하고 따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농촌의 전통적 가치관에서 볼 때 이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르탱에게는 회유와 채근, 압박이 이어진다. 불만에 찬 어린 농부는 마침내 가족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나기에 이른다. 남겨진 그의 아내 베르트랑드는 그와 함께 했던 세월 정도의 시간을 ‘정조’를 지키며 남편을 기다리는 데 보낸다. 그리던 어느 날 그녀의 삶에 ‘새로운 마르탱’이 들어온다. 이웃들은 마르탱의 귀향을 기뻐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돌아온 마르탱은 ‘진짜’ 마르탱이 아니다. 단지 마르탱과 닮은, 이전의 방황하던 삶을 청산하고 마르탱을 사칭해 그가 누릴 수 있었던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자 했던 영리한 거짓말쟁이일 따름이었다. 그녀는 이내 돌아온 마르탱이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진심으로 그를 받아들이고 가짜 마르탱의 사기에 공모자가 된다.
이들의 삶은, 이 괴이한 사건의 발단은 당시의 시대와 맞물려 있다. 표면적으로는 조혼이 허락되지 않지만 실상 대수롭게 여겨지지 않고 빈번하게 행하여지던 시대상, 마르탱과 같은 자유로운 영혼에게는 족쇄와 같이 느껴졌을 농촌사회의 가부장적 질서와 이해 곤란한 관습들, 어처구니없는 부부관계와 마르탱의 가출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이혼을 선택하지 못한 베르트랑드의 여성으로서의 명예와 정조 관념, 문제에 대한 비이성적 해석과 대처를 요구하는 가톨릭 신앙과 미신의 혼재.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마르탱은 급기야 가족을 방기하고 가출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마르탱으로부터 무책임하게 버려진 베르트랑드는 마르탱이 채워주지 못한 충직한 가장과 남편의 역할을 채워주는 한 사나이가 나타나자 기꺼이 그를 따랐다. 그들 모두에게는 분명 저마다의 도덕적 결함,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죄’가 있다. 그렇다고 선뜻 그들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있는가? 만약 그들이 당시의 시대가 아닌 다른 시대를 살았다면, 특히 오늘날을 살았다면 이 책에서 묘사하는 그러한 불쾌하고 당혹스러운 사건에는 휘말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탱 게르 사건은 16세기 프랑스라는 조건에서만 발생할 수 있었던 시대의 산물인 셈이다.
이와 같은 시대의 멍에 속에서도 어떻게든 돌파구를 모색하는 중생들의 모습은 씁쓸한 경탄을 자아내기까지 한다.
가족을 비롯해서 자신이 책임져야할 모든 것을 무책임하게 버리고 홀연히 종적을 감춘 ‘진짜’ 마르탱 게르의 행동은 오늘날의 관점으로도 비난을 면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의 ‘부도덕한 결단’에는 분명 주체성이 내재되어 있다. 자신에게 강요된 삶이 아닌 자신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쉽지 않은 일이거니와 그 시대에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비록 다리 한 쪽을 잃고 자신의 정체성마저 다른 사내에게 가로채어진 처지가 되었지만 ‘고귀한’ 이들과 고락을 함께 하며 전장을 누빈 마르탱은 남에게 규정된, 전통사회에서 부과하는 의무에 끌려가는 삶이 아닌 본인의 삶을 살았다.
베르트랑드와 ‘가짜’ 마르탱의 노력도 눈여겨볼만 하다. 그들이 사는 전통적인 농촌 공동체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정당화하고 미래를 꾸려나가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프로테스탄트’와 관련된 부분이다. 저자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는 새 마르탱과 베르트랑드가 “진정한 부부”로서 함께 살던 세월 동안 프로테스탄트 메시지가 그들에게 어떤 희망을 주었을지 가늠해본다. 그것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죄에 대한 ‘고해’는 신에게만 아뢸 수 있는 것이지, 어떤 인간 중개자를 통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예수 시대의 사도들이 예수에게 ‘죄를 용서할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복음서의 내용을 근거로 기존의 가톨릭교회는 사제를 성자의 대리인으로 두어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 노릇을 하게 했다. 하지만 베르트랑드나 새 마르탱이 어떻게 자신들의 그 비밀스런 죄를 인간에게 고백할 수 있겠는가. 교회는 그들을 파문할 것이고 소문은 일파만파 퍼져서 세상 사람들이 던지는 돌을 맞게 될 것이다. 설령 최대한 선처를 받는다 해도 어쨌든 그들의 혼인관계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될 것임은 분명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인간과 신이 중개자 없이 직접 통교해야 한다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만인사제설은 이들에게 얼마나 희망적으로 받아들여졌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나아가 장 칼뱅이 주장한 예정설은 이 부부가 ‘자신들이 제멋대로 만들어 낸 삶’이 신의 섭리의 일부라고 정당화할 주요한 신학적 논거를 제공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1545년 이후 장 칼뱅이 지도하는 신교 도시 제네바에서 제정된 새로운 혼인법에 대해서 들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결혼은 더 이상 가톨릭교회에서 말하는 의미의 ‘파기할 수 없는’ 성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버림받은 아내는 “남편에게 원인을 제공하거나 결코 죄를 범한 경우가 아니라면” 1년간의 조사가 끝난 후 장로 회의로부터 이혼하고 재혼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 《마르탱 게르의 귀향》, 양희영, 지식의 풍경, 2000, 7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