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역사를 살다’ 독서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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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역사를 살다’ 독서 보고
1.새 시대를 꿈꾸는 창조적 소수자
한국기독교장로회는 분립되어 50주년을 맞이하였다. 그런데 왜 굳이 기장은 50주년을 맞이하며 다시 희년을 말하는가? 그것은 ‘새 역사’ 50주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기장의 새 역사는 성서의 중심 주제인 희년을 이 땅에 실천하는 선교 운동적 차원에서 새 역사이다. 따라서 기장의 새 역사 운동은 “교회는 개혁되었고, 또한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교회 갱신을 목표하였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출발은 1940년 설립된 조선신학교로부터 연원한다. 대다수 신학교들이 교회들에 의해 설립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기장은 신학 운동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식민지하에서 한국 민족은 해방되었다. 그러나 그 해방은 미완의 해방이었다. 왜냐하면 식민지하에 있었지만 하나였던 한국 민족은 해방 후 둘로 분단되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한국 교회는 분단된 상황에서 남북한 교회가 각기 교회 재건을 추진하였다. 북한 교회는 출옥 성도들의 교회 재건 원칙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소련군이 점령 하에서 교회에 대한 감시와 탄압에 대흥하기 위해 교회 재건을 서둘렀다. 남한 교회는 1945년 9월 새문안 교회에서 남부 대회로 모여 교회 재건을 추진하였다.
한국 교회의 보수 교권주의자들은 1940년 조선신학교 설립 때부터 설립 시기와 성격 문제로 조선신학교를 자유주의 신학의 본거지로, 그리고 일제에 동조한 친일 교육기관으로 매도하였다. 하지만 조선신학교는 ‘자유주의 신학’을 지향한 것이 아니라 ‘신학의 자유’를 지향했던 것이다. 조선 신학교는 교육 이념 수립에 있어서 지금까지 물려받은 전통적인 보수적 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학문적인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확보함을 목표로 하였다. 조선 교회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사대주의를 버리고 자주 자립적인 교육을 다짐하였다.
해방 후 남북 장로교회의 재건에 있어서 가장 큰 변수는 북한에서 종교 자유란 이름으로 행해진 박해를 피해 내려온 개신교 지도자들과 본국으로 귀환하였다가 돌아온 외국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한국 교회의 보수화와 교권주의 파장에서 커다란 변수로 작용하였다.
기장은 남한 교회의 정통성을 갖지만 그 권위와 위상을 빼앗겼다. 그러나 그것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여 이 땅에 교회와 사회 개혁을 위한 예언자직을 감당하였다.
한국교회사에서 기장의 의의는 그 수적인 성장이나 물량적인 힘에 있지 않다. 작은 교단으로 우리는 한국 민족사 속에서 그 누구도 하지 않은 이 땅의 정의와 진실, 그리고 평화를 위해 소리 없이 녹고 자기를 버리는 소금의 역할을 해 왔다. 역사의 어두운 밤에 민족과 교회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비추는 작은 빛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 왔다. 그러나 기장의 이러한 예언자적 사명의 길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다. 고난 속에서 십자가를 지는 길이었다.
기장의 사회 선교에 있어서 민주화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이 통일 운동이다. 한국 민족의 역사적 과제를 선교적 소명으로 삼았던 기장은 교단 출범 이후 줄곧 자주적 민주 통일 국가 건설을 이 땅의 하나님 나라의 실현 과제로 받아들였다.
희년은 격동하는 한국 현대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와 뜻을 이 땅에 이룩하기 위해 노력해 온 기장에서 그것은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아름다운 상급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또다시 새로운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는 도전이다. 한국 교회의 개혁 운동으로서의 기장의 새 역사 운동은 지난 50년 동안 이 세상과 역사에 대한 책임을 위해서 예언자적 정신을 가지고 비록 소수였지만 불의와 악에 저항하며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해 온 역사였다. 그리고 이것이 기장으로서는 역사와 민족에 대한 봉사라고 믿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