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감상문 연규홍 『역사를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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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연규홍 『역사를 살다』
요약정리
I. 새 시대를 꿈구는 창조적 소수자
기장은 1953년 6월 10일 분립되었다. 2003년은 기장이 분립된 지 50년, 즉 희년(禧年)이 되는 때였다. 기장은 3가지 전제 위에서 희년을 강조해야 한다. 첫째, 교회는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라 할지라도 이 땅에 존재하는 한 허물과 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교회는 성서의 말씀에 비추어 언제든지 올바른 교회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셋째, 교회의 개혁은 교회만의 개혁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인간에 대한 책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전제는 기장이 스스로 절대화하지 않고 한계를 인정하여, 새롭게 개혁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환기시켜 준다.
기장은 교회들에 의해 설립되는 여타 대부분의 교단들과는 달리 신학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신학 운동은 1940년에 서울에서 개교한 조선신학교를 그 일차적 결과물로서 만들어내었는데, 이 신학 운동과 학교가 기장이 기존의 예장과 갈라서게 되는 주요한 요인이 된다. 그 일련의 과정은 1945년에 일제 치하에서 해방을 맞이함으로서 본격화된다. 한국의 개신교는 해방 전 일제에 의해 교단이 통합되어 있었으나, 감리교를 선두로 각 교단들이 교파 환원을 전개하였다. 이에 장로교도 1946년 6월 12일에서 13일까지 승동교회에서 남부 총회로 모였다. 이렇게 시작된 장로교는 계속해서 많은 문제와 논란 속에서 진통을 겪는다. 그 중 대표적인 주제들은 일제 하 식민지 시대의 신사 참배 문제, 이에 따른 출옥성도들의 공격, 그리고 조신측의 신학적 노선으로 인한 보수 진영의 신학적 공격과 서북 세력의 정치적 공격 등이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기장, 그리고 그 모태에 있는 조선신학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주목할 만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신학교는 먼저 외래 자본이 아닌 민족 자본으로 만들어진 학교라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또한 그 설립 목적도 조선인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에 두었다. 이것은 단순히 자주성의 문제에 국한되는 사안이 아니다. 이것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로 대표되는 해외 선교사들로 인해 타성적이고 현실 도피적이며, 동시에 사대주의적, 근본주의적 성향을 지니게 된 한반도의 개신교 상황에 새로운 지평으로의 생명력을 불어넣는 선지자적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조선신학교는 신학적으로는 자유주의 노선으로 간주되어 공격당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캐나다 선교부를 제외한 나머지 선교부와 또한 해방 후 월남한 서북세력으로 대표되는 보수주의 진영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조신은 계속해서 버텼고 1953년에 기장을 탄생시켰다. 여기에는 책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받는 노석(老石) 김대현 장로와 송암(松岩) 함태영, 만우(萬雨) 송창근, 장공(長空) 김재준 등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의 노력과 희생 속에 탄생한 기장은 탄생 이후에도 개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기장은 60,70년대에 들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공식 신학으로 채택하고 WCC에 가입하며, 사회 전반에 걸쳐 억압과 모순이 일어나는 곳에 관심을 가졌다. 짧게 말하면 기장은 에큐메니컬 운동에 앞장서왔다.
기장은 조신과 분명 구분되어 불리우지만, 분리시켜 이해할 수 없는, 철저한 상호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송암은 기장 역사에서 다시 살펴볼 주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비록 민족대표 33인 중에는 들지 않았지만, 3.1운동의 실질적 주역이었다. 또한 그는 조선신학교 개교를 준비하는 장로회신학교 설립기성회 실행위원회를 발족한 인물로, 조선신학원 개원에 주도자였다. 사회적으로는 한국민주당 창당발기인이자 훗날 부통령에도 올랐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주적임과 동시에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옳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점에서 그 누구보다 고집스런 성격의 자주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소금처럼 녹아지기를 원하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즐겨하지 않는 겸손하면서도 참여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영성을 ‘목민 영성’이라고 부르는데, 송암의 사상과 생애는 지난 150년의 과거의 양적 성장에 도취되어 있는 한국 교회에 큰 가르침과 도전을 주기에 충분하다.
노석 김대현, 그리고 그의 장남 강제 김영철, 차남 백석 김영환. 이 세 장로는 조선신학교의 출발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그들의 후손들을 통하여 한신에 기여하고 있다. 특히 노석 김대현 장로는 일제 치하에서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길로 교육을 중시했던 인물로, 강인한 성품과 미래를 보는 선구자적 시야를 가졌다. 본래 한학을 배웠던 그는 한일합방 이후 어수선한 1913년, 슬하에 둔 4남 1녀 중 두 아들을 홍역으로 잃고, 특정한 계기를 통해 기독교인이 된다. 그의 나이 35세 때였으니, 지금으로서는 늦은 나이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나, 노석은 이후 그의 삶을 철저하고 지속적으로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그에게서 가장 중요하게 조명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금필헌’ 사상이다. 이것은 나의 모든 것, 즉 소유나 시간, 재능, 그리고 생명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그 모든 것을 주인이신 하나님께 감사로 돌려드려야 한다는 노석의 사상이었다. 그는 이러한 신념 속에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938년 전부터 조선신학원을 설립하는 데 그의 모든 것을 바친다. 노석은 뚜렷하고 철저한 역사 의식과 소명 속에서 조선신학원 설립을 추진했다. 그리고 그의 소명 의식을 금필헌 정신에 따라, 당시 자신의 전재산(자신, 부인, 두 아들, 맏손자로 배분한 뒤 자신의 몫)이었던 50만원을 조선신학원 설립에 고스란히 내놓았다. 여기에 함께했던 인물로 만우와 장공, 그리고 송암 등이 있었다. 노석의 금필헌을 비롯한 하나님을 향해 헌신하는 정신은 그의 아들들인 강제와 백석에게 이어져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뒤를 따르게 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현재까지도, 이 정신은 후손들에게 물려져 장학회로 계승되고 있다.
노석 김대현 장로가 물리적 밑받침을 제공하였다면, 정신적 밑받침은 만우 송창근과 장공 김재준이 크게 감당하였다. 비록 이들에 대해서 친일과 배교(신사참배), 신학적 노선 등의 명목으로 공격이 이어지고 있으나, 이는 대부분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하간 이들은 오늘날 한신에 이르는 조신의 신학 사상과 노선을 내놓은 인물들이다.
II. 광야의 고난을 통해 이룬 기적
한국교회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수히 다양한 교단을 낳았다. 이는 신학적 노선의 차이로 인한 것도 있었으나, 정치적 알력 다툼에서 빚어진 영향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이는 해방 후에 한국 장로교회의 재건에 있어 주도권 경쟁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학교 운영권은 주도권 경쟁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그 논란의 중심은 조선신학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