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초당 답사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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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두보초당 답사 보고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두보초당(杜甫草堂) 답사보고서
목 차
Ⅰ.답사 출발
Ⅱ. 두보의 생애와 사상
1. 두보의 생애와 작품
2. 두보의 작품 분석
3. 두보의 사상
4. 두보초당
Ⅲ. 답사 후기
Ⅰ. 답사 출발
중국 사천성 청두(成都)에 관한 여행지 소개 책자에는 ‘두보초당’에 대한 소개가 항상 나온다. 당대의 시인 ‘두보’가 약 4년간 거처하며 주옥같은 시를 썼던 곳이다. 역사의 인물이 살았던 이곳 청두(成都)에 살지만 자주 가 보지 못했던 곳이다. 토요일에도 주말한글학교를 다녀서 많이 바뻤는데, 이번주는 한글학교가 임시 휴교를 해서 자녀들과 함께 오래 간만에 두보 초당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았다. 두보초당은 집 근처 서남 민족대학에서 택시로는 약 10분, 자전거로는 약25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오늘은 @@들 을 데리고 집근처에서 사천식 자장면을 맛있게 먹고, 전동차(電動車, 한국 스쿠터 모양인데 전기로 충전하는 교통수단)에 두 명을 태우고 두보초당을 향했다. 엄마와의 외출에 기뻐서 조잘대는 @@들에게 우리가 사는 이곳에 유명한 시인 ‘두보’가 살았었다는 설명을 해주며 달리다 보니 20여분 만에 두보초당에 도착했다. 두보초당 외곽을 끼고 물이 흐르고 있어서 참 아름답고, 근처에는 별장으로 된 집들이 많다. 한국 총영사관 관저도 이 근처에 있다.
두보 초당은 四川省 成都市 草堂路 (쓰촨성 청두시 차오탕루)에 위치한다.
Ⅱ. 두보의 생애와 사상
1. 두보의 생애와 작품
두보의 자(字)는 자미(子美), 호북성(湖北省) 양양(襄陽)사람으로 711년에 출생했다. 두예의 13대손으로 소릉에 거주했고, 그의 조부는 초당시인 두 심언(杜審言)이고, 그의 부친은 두 한(杜閑)으로 역시 낮은 벼슬을 지냈다.
두보가 살던 시대는 당나라가 찬란한 번영을 이루하다가 안사의 난(755년)을 맞아 제국의 붕괴위기를 맞았던 때였다. 그의 생애는 크게 보아 755년에 발발한 ‘안사의 난’을 중심으로 전 후반으로 양분된다.
‘안사의 난’ 이전, 그는 당대의 다른 시인들처럼 독서와 유람으로 견문을 쌓아 착실히 벼슬에 나아갈 준비를 하였다. 735년 24세 때 진사 시험에 낙방한 후 곤주사마였던 부친을 따라 산둥에 가서 이백, 고적(高適) 등과 함께 자연을 즐기고 시를 읊으며 친교를 돈독히 했다. 746년 이후 두보는 거처를 장안(長安)으로 옮겨와 고위 관리에게 벼슬을 구하는 간알시(干謁詩)를 써서 보내며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자 애썼다. 이러한 생활이 10년간 지속되면서 두보는 점차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놓였고 당시 귀족들의 사치와 민중들의 궁핍한 삶에 대하여 절감하기 시작했다.
751년, 《삼대예부》를 조정에 바쳐 인정을 받아, 755년 10월에 우위솔부 주조참군의 벼슬에 올랐다. 10년간 벼슬에 오르기 위해 노력한 결과로, 무기의 출납을 관리하는 우위솔부주조참군(右衛率府曹參軍)이라는 하위직 벼슬을 받고 스스로 낭패감에 휩싸 였다.
관리가 된 뒤 한 달 뒤인 11월, 당 왕조를 거의 멸망시킬 만큼 파급력이 대단했던 ‘안사의 난’이 발발한다. 당시 당의 현종이 양귀비와의 사랑에 빠져 정치를 게을리하여 국운이 쇠퇴했는데, 이런 나라의 형편을 읊은 장편 시 《영회》는 걸작으로 유명하다.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은 촉으로 피하고 숙종이 즉위하였다. 두보는 잠시 장안 근처 부주(州)에 맡겨둔 가족을 만나러 갔다가 어린 아들이 먹지 못해 요절한 사실을 알고 참담한 마음으로 장편시 장안에서 봉선으로 가며 회포를 읊어(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에서는 벼슬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자신을 돌아보고 당시 귀족들의 사치와 민중들의 궁핍한 처지를 그렸으며 총체적인 사회의 부패상을 고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