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 좋은 것을 선택합시다(요한복음 12장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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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설교문 - 좋은 것을 선택합시다(요한복음 12장1-8절)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요 12:1~8
“아프니까 청춘이다.” “천 번이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힐링이 대세입니다. 청춘의 아픔에 공명하고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담은 많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매우 분주하고 피로한 삶을 살고,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와 격려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힐링의 삶이라,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 땅을 살았던 사람들 뿐 아니라 바로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도 주님의 메시지에 큰 위로와 격려를 얻습니다.
얼마 전, 어떤 유력한 정치가가 쓴 책을 보다가, 뜻밖에 수긍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분도 종종 대학 학생회나 청년단체로부터 강연 요청을 받고 한다고 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청년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강연을 해 주십시오.” 라는 요청입니다. 근데 이 분은 위로가 좋은 일인 줄 알면서도 그런 말을 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그 분이 한 말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자기의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타인의 위로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청년은 아기가 아니다. 넘어져 무릎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상처를 입어도 혼자 힘으로 일어나야 한다. 그런 사람이라야 비로소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다 동의할 수는 없어도, 그래도 좀 수긍이 가는 말입니다. 공치사나 영혼 없는 위로도 문제이지만, 위로가 정말 도움이 될까를 묻게 됩니다. 상대가 위로를 원하는 것을 알고, 위로가 마음을 달래고 새로 일어나는 데 큰 힘이 된다는 것은 알지만, 혹 위로만 받다가 평생, 위로만 받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생겨납니다. 자신에게 정직하게 질문하지 않는다면, 다시 주어진 삶에 성실하게 분투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위로는 정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제 자신부터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다니 동네에 살고 있는 나사로와 그의 여동생 마리다와 마리아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완전히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이 나옵니다. 다시 베다니를 찾으신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사도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며 세운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며 격려했던 것처럼 우리 예수님도 자신이 살려 놓은 나사로를 보고 싶어서 다시 베다니를 찾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예수님의 은혜를 나사로와 그의 여동생들은 생생하기 기억하고 있었으며, 예수님께서 다시 베다니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아마 그들은 흥분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으리라 여겨집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르다의 집을 방문하십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시고 교제하셨습니다. 특별히 듣는 무리 중에서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 아래에서 그분의 말씀 하나 하나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언니인 마르다는 혼자서 분주하게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서 부엌에서 요리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힘겹게 요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봐도 동생 마리아는 언니를 도와서 손님들의 음식상을 차리는 것을 도와야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누가 와서 뭐라고 한들 도무지 예수님의 발치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눈빛은 예수님의 눈과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만 오직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마르다는 예수님께 자신의 불만을 얘기합니다. “예수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한마디로 예수님께 마리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더욱 더 마르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1~42)
인간적으로 볼 때, 마르다는 사회생활을 많이 경험한 직장인처럼 분주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직시하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생 마리아는 직장인과는 거리가 먼 교회 생활에만 열심을 내는 백수 같은 청년인 것 같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눈은 의식하지 않는 자신이 원하는 것만 하는 고집스런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베다니 마을 잔치에서 나사로 남매는 모두 다른 위치에서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여전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무리들과 함께 있습니다. 마리아는 좀 다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발치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에 예수님의 말씀에 청종하며 머물러 있었던 발치와는 다른, 예수님의 발을 향해서 그녀의 몸을 엎드리어 향유옥합을 깨뜨려 그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닦고 있습니다. 이전의 마리아와 지금의 마리아는 분명 다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모습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녀는 여전히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지만, 그녀는 지난 번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오직 말씀에만 집중하였던 시간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뿐만 아니라 감정, 성품, 눈빛 등을 통해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마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 일을 예수님을 통해 이루실 것을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알게 된 것입니다.
요즘 이 시대를 치열하게 전쟁하듯 살아가는 많은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마르다처럼 분주하게 세상의 일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교회가 무엇을 가르쳐야할까요?
세상에서의 싸움에서 지치고 힘들어 할 때마다 교회와 목회자들이 달콤한 사탕처럼 위로의 말만 해 주는 것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열심히 분주하게 일하던 마르다를 예수님은 좋은 말로 위로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리아처럼 좋은 것을 선택하도록 권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변화를 가져다주며 평안과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며 이 세상을 이겨 나갈 수 있는지를 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사람들을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때로 우리는 주님의 엄숙한 얼굴 앞에 서야 합니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인자한 얼굴로 우리를 위로하시는 주님 앞에 설 때가 많지만,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긍휼하신 주님과 만날 때가 더 많지만, 예수님은 단연한 의지로 우리 자신의 모습과 한계를 깨뜨리고 자신과 같이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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