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닉스 세미나] 성서출판, 찬송가 사업과 에큐메니즘 성서와 찬송가의 연합사업에서 나타난 갈등과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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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닉스 세미나] 성서출판, 찬송가 사업과 에큐메니즘 성서와 찬송가의 연합사업에서 나타난 갈등과 분열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성서출판, 찬송가 사업과 에큐메니즘
성서와 찬송가의 연합사업에서 나타난 갈등과 분열
1. 들어가며
초기 한국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성경번역과 찬송가 편찬은 중요한 사업 중 하나였다. 1896년 영국성서공회가 한국에 지부를 설립하자 이후 외국의 어려 성서공회들이 한국에서 성경번역과 사업을 시도하였고, 찬송가 또한 1892년에 북감리교회의 존스와 로드와일러로 인해 편집되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러일전쟁(1904), 을사조약(1905), 정미7조약(1907) 등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려는 조치가 노골적으로 나타나면서 항일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이에 따라 교파연합 운동이 고조되었으며 이 상황은 성경 연합 사업에 영향을 줬다. 3공회가 연합하여 활동하는 이전에 일제의 강점과 항일운동과 교파연합운동의 고조, 1907년에는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러 해 동안의 논의 끝에 1904년에 한국성서위원회(The Bible Committee of Korea, 이하 BCK)와 연합지부(Joint Agency)가 조직되어 그 후 4년간 3공회는 연합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대한성서공회,『대한성서공회사Ⅰ. 조직, 성장과 수난』(서울:성인문화사,1993), 275)
, 1905년에는 재한복음주의 선교사공의회 대표 150명이 모여 한국단일교회 조직을 논의하는 석상을 가지기도 했다. 한국단일교회의 논의는 찬송가의 연합 사업에 출발점이 되었다. 재한복음주의 선교사공의회의 대표자 150명이 모여 한국단일교회 조직을 논의했으며, 석상에서 찬송가의 연합이 중요한 한 사업으로 결의되었다. (서정민, 『한국교회찬송가사 서평』, 1999, 208)
이러한 국가적 상황과 교단간의 논을 통해 교파와 교단을 초월한 에큐메니즘, ‘연합활동’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04년 한국성서위원회와 연합지부가 조직되었고, 그 후 3공회(NBAA, ABS, BFBS)가 연합하여 성경사업을 하게 되었다. 찬송가 사업에서는 1908년에 총262으로 편찬된 ‘찬숑가’가 간행되었다. 성경과 찬송가 사업에서 나타난 선교사들의 에큐메니즘적 시도는 일시적으로는 성공했지만 교파와 교단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해 또 다시 분열과 갈등을 초래하기도 했다. 특히 ABS와 BFBS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교파 갈등으로 간행된 신정찬송가와 신편찬송가는 연합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본 발제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예를 중심으로 연합과 분열 과전에 나타난 갈등과 극복을 살펴보려고 한다.
2. 찬송가 사업에서 나타난 연합에 대한 시도
1905년 재한복음주의 선교사공의회에 150명의 대표자가 모임으로 ‘연합’ 찬송가사업이 출발을 한다. 1892년 북감리교회에서 한국의 첫 찬송가인 ‘찬미가’ 나오자 장로교에서는 언더우드 편의 ‘찬양가’가 1894년에 간행되었고 서북지역 장로교회에서는 그래함 리, 그포드 부인 편비의 ‘찬셩시’도 간행되었다. 그 외에도 동아기독교의 펜웍이 편집한 ‘복음찬미’(1899)와 성공회의 ‘셩회숑가’(1903), 구세군의 ‘구제군가’(1908)등의 각 교파마다 찬송가를 별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선교사들은 교파별로 다르게 사용되는 찬송가가 아닌 교파를 초월하여 하나가 된 공동찬송가를 원했다.
먼저 언더우드는 정, 감 선교지부에서 공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찬송가를 편찬했다. 총117장으로 편찬된 ‘찬양가’는 88장이 곡조를 지닌 첫 찬송가였지만 공동찬송가로 채택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언더우드가 정, 감 연합하여 편찬한 것이 아니라 단독으로 마무리했다는 비난과 하나님이 아닌 ‘여호와’를 사용했다는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서정민, 『한국교회찬송가사 서평』, 1999, 207
결국 언더우드의 찬양가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남쪽 장로교에서만 사용되었으며, 채택하지 않았던 장, 감리교는 따로 ‘찬셩시’와 ‘찬미가’를 사용했다. 즉 언더우드의 ‘공동찬송가’는 실패로 끝났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교파를 초월한 찬송가에 대한 기대는 끊이지 않아다. 1902년부터 장로회공의회가 찬송가 합동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1905년의 선교사공의회까지 이어지게 된다. 조숙자, 『한국 최초의 개신교 통일찬송가 ‘찬숑가’(1908년) 연구』(1995), 2
1905년 9월 재한복음주의 선교단체들이 교파 연합운동의 일환으로 복음주의 공의회 자리에 모였다. 150명의 대표자가 모인 가운데 찬송가의 연합이 중요한 한 사업임을 결의하였다. 서정민, 『한국교회찬송가사 서평』, 1999, 208
그 후에 통합공의회가 조직되고 여러 교단의 찬송가 위원들이 ‘통합공의회 찬송가 위원회’를 조직하고 공동찬송가를 준비하여 발행할 권한을 부여했다. 조숙자, 『한국 최초의 개신교 통일찬송가 ‘찬숑가’(1908년) 연구』(199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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