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문명의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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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유목문명의 재조명
들어가는 말
세계의 역사 속에서 4대 文明을 이야기 할 때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이집트, 황하 문명을 꼽는다. 이 대표적인 4대 문명을 자세히 살펴보면 大河를 낀 넓고 비옥한 땅에서 농경을 중심으로 발전한 定住文明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정주’란 무엇인가? 그것은 문자 그대로 ‘땅에 정착해서 거주 한다’는 뜻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의 시작과 발전은 ‘정주’, 즉 농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견해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정주문명과 함께 역사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어쩌면 현 시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유목문명’, 즉 ‘이동문명’에 대한 것이다.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유목민족을 떠올리면 ‘야만인’이란 생각을 떠올리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유목민족은 정주민족과 함께 역사 속에서 그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것과 때로는 정주민족을 제압하고 그들을 지배했다는 것을 역사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팍스아메리카나’라는 말이 있듯이 12-13세기 에는 ‘팍스몽골리카나’라는 말을 써도 무방할 만큼 유목민족의 힘은 막강한 것이었다.
1. 유목민족의 활동무대
유목민족의 활동무대가 되었던 유라시아대륙은 생태조건이라는 면에서는 크게 몇 개의 지대로 구분된다. 우선 북극해에 연하고 있는 얼어붙은 동토, 즉 툰드라가 있고, 그 아래로는 울창한 침엽수림으로 이루어진 타이가지대가 위치해 있다. 이 곳에서는 기술문명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던 전통시대에 그 혹독한 자연조건으로 인해 인간의 집단적이고 항구적인 생활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소수의 수렵민과 순록유목민만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았을 뿐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륙의 최남방에는 온대 아열대 기후와 풍부한 강우량에 힘입어 농경이 가능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인구의 집중과 증가가 이루어지고 드디어 정주적인 인류문명의 요람이 탄생되었다. 유라시아대륙의 이 양극 사이에 위치한 지대가 바로 초원과 사막인데, 여기에는 또 다른 형태의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유목민이 자리를 잡았다. 이 지역을 가리켜 내륙아시아 중앙아시아 중앙 유라시아 등의 이름으로 부르는 까닭도 바로 이곳이 대륙의 변두리가 아니라 심장부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몽고초원지대의 유목민의 역사를 중심으로 글을 전개하고자한다.
일반적으로 몽고초원지대를 고비사막을 중심으로 ‘내몽고’와 ‘외몽고’로 구분하는데 남북몽고는 강우량과 목초량에서 서로 유사하면서도 약간 상이한 측면을 갖는 흥미있는 구도를 보여준다. 우선 북몽고는 북에서 남으로 내려올수록 강우량이 적어지고 그에 따라 목초량도 감소하여, 알타이산록에서 흥안령 기슭에 이르는 몽고북방의 풍부한 초원지대인 ‘항가이’, 항가이산맥과 헨테이산맥 이남에서 고비사막에 이르는 ‘스텝(steppe), 그 남쪽으로 펼쳐진 자갈과 덤불이 주된 경관을 이루는 반사막 ’고비(Gobi)로 나뉘어 진다. 반면 남몽고는 서쪽으로 갈수록 이와 유사한 현상을 보여, 차하르와 시린골을 중심으로 하는 ‘중초원’, 그 서북쪽의 동서 순니드 왕부를 포함하는 ‘중간초원’, 그보다 더 서쪽의 울란차브를 중심으로 하는 ‘경초원’으로구분되고 있다.
몽고초원의 이러한 내적인 다양성과 환경상의 차이에 따라 유목경제의 특징과 이동양식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풍부한 초원지대에서 유목하는 집단일수록 이동거리도 자연 상대적으로 짧아지고 가축의 구성에서도 낙타와 산양보다는 소가 차지하는 비율이 커진다. 뿐만 아니라 몽고초원에 건설된 대부분의 유목국가는 그 중심지가 북몽고의 경우는 항가이지역에, 남몽고의 경우는 중초원과 중간초원지역에 있었다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물론 풍부한 목장에서 비교적 높은 생산성의 유목경제를 영위하고 이를 바탕으로 유목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2천년기에서 1천년기로 넘어오는 시기에 처음으로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 기마유목민에 대해 이미 일찍부터 농경지역의 사가들은 경이의 눈으로 관찰해 왔다. 사마천은 흉노인을 두고 “수초를 따라 옮겨 다니고 성곽과 항상 머무는 곳이 없었으며, 그리고 농사를 짓지 않았다”라고 하였고, 헤로도투스 역시 스카타이인이 “도시도 성채도 갖지 않고 어디를 가나 집을 가지고 다니며, 모두 말 위에서 활을 쏠 줄 알았고 농사가 아니라 가축을 키우며 살았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이동이라는 것이 유목의 가장 중요한 특징임을 지적한 고전적이 사례들이긴 하지만, 이동만이 유목의 성격을 모두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목은 “고정된 거주지나 축사를 갖지 않고 그 사회의 성원 대다수가 광역적이며 계절적인 이동을 통해 가축을 사육함으로써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식량생산의 특수한 한 형태”라고 정의 할 수 있다. 따라서 유목(nomadic pastoralism)은 목축(pastoralism)보다 훨씬 좁은 개념이다. 즉 유목은 이동적 목축이면서 동시에 사회구성원의 일부만이 전문적 가축사육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가 모두 이동적 목축에 참여하고, 목축생산물을 시장에 판매함으로써 생기는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한 것일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유목이라 부를 수 있으며, 그러한 생활을 하는 인간집단을 유목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식량채집이 아니라 식량생산경제에 종사하는 유목민들은 스스로를 정주민에 비해 결코 저급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더러, 차라리 농민을 토지에 속박되어 지력에만 의존하는, 다시 말해 가축과 다를 바 없는 부자유한 존재로 보았다. 그들이 역사상 흔히 잔인한 약탈과 살육을 자행한 것을 두고 피해자 측에서는 ‘사람의 가면을 썼지만 짐승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사실 그 같은 잔혹함은 그들의 야만성에서가 아니라 정주농경민에 대한 문화적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러한 편견은 비록 반대의 형태이기는 하지만 농경민들에 의해서도 공유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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