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선교대회와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즘 - 1910년 에든버러 대회와 1928년 예루살렘 대회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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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계선교대회와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즘 - 1910년 에든버러 대회와 1928년 예루살렘 대회를 중심으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에큐메닉스
세계선교대회와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즘
- 1910년 에든버러 대회와 1928년 예루살렘 대회를 중심으로 -
Ⅰ. 들어가며
지난 19세기에 나타난 서구세계의 해외선교에 대한 열정은 교파적 색채를 띤 기독교 확장의 역사를 가져왔다. 해외선교에 대한 서구 개신교 각 교파의 경쟁적 노력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광범위한 지리적 확장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서구 기독교 선교사들은 선교 현장에서 여러 교파들 간의 경쟁으로 인해 선교 사업의 중복, 불필요한 갈등들을 경험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러한 마찰과정을 경험하면서 피선교지에서 일정 기간 선교활동을 전개해 나가던 선교사들은 선교 현장에서의 첨예한 교파의 구별과 경쟁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고, 여러 곳에서 체험되던 ‘선교 에큐메니즘’(Missionary Ecumenism) ‘선교 에큐메니즘’에 대한 영문표기는 아직 공식적으로 누군가에 의해 언표 된 바가 없다. 따라서 발제자가 임의로 ‘Missionary Ecumenism이라 명명하여 사용하기로 한다. 홍승표, 홍이표, “선교에큐메니즘과 언더우드” 발제문, (2006-2 에큐메닉스 세미나 발제. 2006), 1.
의 자각이 피선교지 현장에서 대두되게 되었다. 서정민, 『한국교회의 역사』, (서울: 살림출판, 2003), 14-15. 홍승표, 홍이표, 1에서 재인용.
이렇듯 피선교지에서의 교파간의 연합과 사귐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19세기 중엽부터 선교단체들 간의 연합과 협동 분위기가 무르익은 결과, 1910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세계선교대회’가 열리고 1921년 미국 뉴욕에서 ‘국제선교협의회’(IMC)가 창립되어 20세기의 에큐메니컬 운동의 막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조직될 때까지 국제 선교 협의회는 교파 간의 체제, 교리, 신학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선교세력을 한데 묶어 선교지의 신생교회들을 지원하는 연합선교운동에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홍승표, 홍이표, 1.
한국 역시 다른 선교현장과 마찬가지로 초기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선교사들에 의해서 주도된 나라로서 선교사들의 위와 같은 연합활동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선교현장의 본토민의 참여가 제한되어 있었던 한계를 분명히 갖고 있었다. 한국교회가 세워지는 데에는 선교사들의 노력과 세계선교대회와 같은 대대적인 움직임이 있었지만, 동시에 한국교회 내에서도 한국의 토착교회를 세워갈 역량을 갖춘 지도자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그것을 위한 연합운동들이 함께 맞물려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본 발제를 통해 1910년의 에든버러 대회와 1928년의 예루살렘 대회라는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흐름에서의 한국교회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세계선교대회와 한국교회와의 관련성 측면에서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에 앞서 1910년대와 1920년대의 세계선교의흐름과 한국교회의 상황을 먼저 검토해보겠다. 그리고 ‘선교사 위주의 에큐메니즘’에서 ‘본토민 신자 위주의 에큐메니즘’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세계선교대회가 어떠한 동력으로 작용하였는지 그리고 그 의의가 무엇인지를 찾아보고, 한국교회 내부적으로 또 다른 어떠한 에큐메니즘 동력이 작용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세계선교와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의 흐름 - 1910년대와 1920년대를 중심으로-
1. 세계선교의 동향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선교를 효율적으로 추구하기 위한 세계선교대회(World Mission Conference)가 1910년 6월 14일부터 23일까지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의 뉴칼리지에서 개최되었다. 현대에큐메니컬 운동의 진원지라고 불리는 이 세계선교대회는 그 전까지 간헐적으로 모여왔던 선교대회들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교회 일치운동사의 일대 분수령을 이루었다. 이때까지 세계선교에 관한 낙관적 견해가 팽배하여 ‘이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가 이루어질 것이 기대되고 있었다. Hay Sawayar, "The first World Missionary Conference: Edinburgh 1910,"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 267(1978), 257. 최재건, “1928년 예루살렘 국제선교협의회와 한국교회,” 「신학논단」45(2006/7), 183-4에서 재인용.
에딘버러 대회 이후에 IMC 창설을 위한 준비위원회가 소집되어 존 모트(John Mott)가 회장으로, 올드햄(J. A. Oldham)이 서기로 선출되었으나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활동이 소강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종전 후 1920년 스위스에서 세계선교 기구들의 대표들이 모여 이듬해에 국제선교협의회를 조직하기로 하였고, 그리하여 1921년 뉴욕에서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가 창설되어 선교협력과 일치의 촉진을 다짐한 에딘버러 대회의 정신을 계승했다. William Richery Hogg, Ecumenical Foundation(NY: Harper & Brothers, 1952), 98-142. 최재건, 184에서 재인용.
이 대회에서는 The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이란 저널을 출간하고 선교사들이 현지에서 당하는 인종문제를 비롯한 제반사항을 공동으로 연구하기로 결정하였다. 브라운(Ather J. Brown)의 주도 하에 선교의 목표가 토착교회의 설립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신생교회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뒤이은 세계선교기구 회합이 전진해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김은수, 『해외선교의 흐름과 주제』,(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34. 최재건, 185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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