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한선교사의 신학적 경향성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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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내한선교사의 신학적 경향성에 대한 고찰
여는 글
내한 선교사들의 신학을 이해하는 다양한 관점과 방법들이 있다. 어떤 이는 내한선교사의 공통된 신앙적, 신학적 특성을 규명하며, 어떤 이는 교파적, 개인적 차별성을 엄격히 구분짓고 있다. 이러한 양자의 관점들은 나름의 학문적 의미와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선교사들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아울러 한국교회 신학사상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선교사의 신앙, 신학적 배경과 내한 이후의 사상적 변화와 노정에 대해 관심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한국 신학의 근저(根底)에 흐르는 기원적 사상으로서 ‘선교사들의 신학’을 애써 외면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선교사들의 신앙과 사상을 기초로 한국교회와 한국신학이 형성되었다는 단순한 진리를 부정할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한 선교사에 대한 신학적 경향성 필자는 본 소고의 제목을 ‘내한선교사의 신학적 경향성’이라고 정했다. 그 이유는 내한선교사들의 출신, 교파, 성별, 연령 및 세대, 신학적 배경에 따라 그들의 신학적 특징은 어느 한 측면으로 규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체적 흐름과 방향을 가늠할수 있는 ‘경향성’으로 그들의 신학을 탐색해 보고자 했다.
을 탐색해 보는 것은 이후 전개되는 ‘한국신학사’의 시원(始原)을 가늠하는데 유효한 작업이 될 것이다.
1. 내한 선교사의 신학적 배경
미국의 종교사학자 마티는 19세기 미국의 신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미국에는 유럽처럼 거물 신학자는 없었다. 따라서 미국신학이라 할수 있는 것도 없었고, 읽을 만한 신학적 저술도 없었다. 그러나 미국의 신학자들은 미국이 필요로 하는 것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해석하는 일이었다. 정신없이 일만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2차 각성운동 이후 반세기 동안 진행된 놀라운 변화를 묵과할 수만은 없었다. 그들은 미국 상황을 히브리식으로(성서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 역사의 의미를 단일 ’백성‘의 역사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역사적 연원을 따져 들어가 논쟁을 벌이기 보다는 함께 살아가면서 야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골몰했다. M. E. Marty, Righteous Empire : Protestantism in the United States, 2nd ed., (chalres Scribners Sons : New York, 1986), 77.
19세기 미국은 유럽에서의 국가종교 환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대안적 종교 시스템이 요청되고 있었다. 그들에게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일치를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체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9세기 미국은 해외 선교사역의 열기로 뜨거워진 때였다. 그 훨씬 이전에 미국은 제2차 대부흥 운동을 거치면서 복음적 개신교단들이 그 잠재적인 동력을 제공하던 터였다. 제2차 대각성운동으로 예전의 “대각성 운동”(the Great Awakening) 때보다 더욱 강력한 도덕적 개혁, 사회적 성화운동이 전개되었고, 내지해외 선교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조직적인 선교회를 구성하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초교파적으로 1810년 6월에 “미국 해외선교회”(American Board of Commisioners for foreign Missions)가 조직되었고, 1826년에는 “미국 내지선교회”(American Home Missionary Society)가 조직되었다. ; 류대영,『초기 미국선교사 연구』,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36.
이 때 폭발적으로 성장한 학생자원운동(SVM: 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으로 미국 개신교가 해외에 파견한 모든 선교사의 반 이상이 모집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 개신교 해외선교 전체의 내용과 분위기를 이들이 주도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류대영, 같은 책, 53. ; 류대영의 연구에 따르면, 1905년부터 1909년까지 한국에 새로 입국한 미국 선교사는 135명으로 추정되는데, 이 가운데 81명이 SVM을 통해 지원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SVM 지원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4대 주류교단 선교부(북장, 남장, 북감, 남감)를 통해 한국에 들어 왔다고 한다 ; 류대영, 같은 책, 51.
그래서인지, 많은 내한 선교사들이 다녔던 프린스턴, 유니온, 맥코믹, 드루 등의 신학교는 그 교단적, 신학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복음주의적 특색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즉 경건한 삶을 훈련시키고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을 불어 넣는 점에서 이들 신학교들의 큰 차이는 없었다. 류대영, 같은 책, 55. ; 반면 이덕주 교수는 ‘장로교 선교사들은 칼빈주의 원리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기초한 청교도적 신앙원리에 입각해 보수적, 방어적, 폐쇄적인 경향을 보이며, 감리교 선교사들은 경건주의와 복음주의, 개인의 종교적 체험과 교회의 사회적 기능의 조화를 추구하고, 20세기 진보신학도 수용할 수 있는 ’타협적, 개방적, 입장이 가능했다고 구분했다. 그리고 장로교는 보수, 감리교는 진보, 구세군과 성결교는 웨슬리 신학계통이지만 보수, 성공회는 중도적 입장이라고 구분하고 있다. 이덕주,『한국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85. ; 박대인도 이덕주와 유사한 입장이다. 박대인, ‘한국 감리교회 개척자 헨리 G. 아펜젤러’, 「신학과 세계」, 제7호, 1981, 198-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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