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국가] 미국의 한국선교결정의 배경과 정교분리

 1  [교회와 국가] 미국의 한국선교결정의 배경과 정교분리-1
 2  [교회와 국가] 미국의 한국선교결정의 배경과 정교분리-2
 3  [교회와 국가] 미국의 한국선교결정의 배경과 정교분리-3
 4  [교회와 국가] 미국의 한국선교결정의 배경과 정교분리-4
 5  [교회와 국가] 미국의 한국선교결정의 배경과 정교분리-5
 6  [교회와 국가] 미국의 한국선교결정의 배경과 정교분리-6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교회와 국가] 미국의 한국선교결정의 배경과 정교분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미국의 한국선교결정의 배경과 정교분리
1. 들어가며
우리나라가 선교지로 결정될 시기에 ‘조선’은 미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당시의 미국은 한국과 통상조약을 맺어 큰 이득을 볼 것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약은 이루어졌고, 한국의 선교는 시작되었다. 한미수호통상조약 속에 종교의 자유에 관해서는 명시되어 있지 않았기에 선교사들의 선교 사업은 언제라도 탄압받을 수 있었으며, 초기 선교는 조심스러웠다. 한국에 파송되어 온 미국의 선교사들은 정교분리 정책 하에 있었기에 본국의 정책과 ‘불법적인 포교활동‘ 양쪽을 다 고려하여 선교사업을 해야했다.
본 발제에서는 미국이 알려지지 않은 한국을 선교지로 결정하게 된 상황 즉, 미국의 해외선교열기의 배경을 알아보고 초기 미국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원칙 하에서 어떻게 선교를 해야 했는지를 간단하게 짚어보고자 한다. 본 발제는 초기 미국 선교사들의 입국 즈음까지의 시기로 본격적인 선교가 이루어지기 전을 다룬다.(미국의 공민종교는 한국 프로테스탄티즘의 씨앗을 제공하였다. 정교분리 개념과 더불어 국가적 영향으로 그들에게 묻어있을 배경을 살피는 것이 본 발제의 목적이다.)
2. 미국 해외선교열의 배경
(1) 제2차 대각성 운동
건국초기의 미국은 기독교 성장에 이롭지 않은 상황(전쟁으로 인한 교회 파괴, 세속적 민주주의 국가, 개척, 기타 경제상황, 이신론과 유니테리언주의 등)을 제공하여 교회는 침체기를 맞이했다. 신생 공화국이 가진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폭발적인 종교현상으로 표출되었다. 이 폭발적인 종교현상인 제 2차 대각성은 새로운 기독교 단체, 조직, 대학을 양산했는데, 그런 조직들은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대대적인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류대영, 『미국종교사』 (파주: 청년사, 2007), 210.
대각성 기간 동안 미국 대학생들 사이에 선교열이 고조되었다. 1808년에는 이른바 “신앙공동우회(Sosiety of Brethren)가 조직되었다. 이 단체가 조직됨으로써 1810년에는 미국회중교회해외선교본부(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ABCFM은 새롭게 만들어진 회중교회 신학교인 앤도버 신학교(Andover Theological Seminary)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앤도버 신학교는 하버드 대학교의 유니테리언적인 경향에 반발한 외중교회의 전통적 삼위일체주의자들이 1808년에 만든 미국 최초의 목회자 양성 전문기관이었다. ABCFM이 1812년 겨울 다섯 명의 선교사를 인도에 파견하면서, 파란만장한 미국의 해외선교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류대영, 『미국종교사』, 211.
가 조직되었고, 1814년에는 침례교외국선교회(The Baptist Foreign Missionary Socisty)가 조직되었다. 이어서 각 교단사업이 시작되어 1819년에는 감독교회가 외국선교사업을 개척하였고, 1832년에는 감리교회가, 1833년에는 인도에 대한 장로교회 선교사업이 시작되었다. 백낙준. 『백낙준전집 1: 한국개신교사(1832~1910)』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 77.
19세기 시작부터, 이 대각성에서 생성된 힘은 꾸준히 증가하는 자발적인 단체들을 통하여 복음주의 운동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런 단체들은 처음에는 지방단위에서 조직되었다가 점차로 주 단위로 묶여지고 다시 전국적인 조직으로써까지 발전되었다. 전국적인 단체들은 보통 교파를 초월해 있었으며 많은 후원을 받았다. 이 시기는 부흥운동을 가장 잘 흡수한 교파들이 크게 성장하여 전국적인 확장을 하는 시기기도 하였다. 윌리스턴 워커 외저; 송인설 옮김, 『기독교회사』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3), 723~724.
마크 A. 놀 지음; 최재건 옮김, 『미국캐나다 기독교 역사』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5), 217~218; 2차 대각성 운동에서는 1차 때와는 달리 감리교인들과 침례교인들, 제자교회 교인들이 우세했다. 2차 대각성 시기에는 식민 시기의 부흥운동이었던 1차 대각성과 달리 무수한 자원단체들이 결성되었고, 그 동력을 주입받았다. 티모시 드와이트의 학생들 중의 하나였던 리이먼 비처(Lyman Beecher, 1775-1863)는 부흥의 힘을 조직해서 미국을 복음화하고 개혁할 영구적인 기관을 만들려고 특별히 많은 활동을 했다. 비처와 그의 비전을 공유한 사람들의 노력을 통해 미국은 미국해외선교위원회(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1810), 미국성서공회(American Bible Society, 1816), 노예해방을 위한 이주정책협회(the Colonication Society for liberated slaves, 1817), 미국주일학교연합회(the American Sunday School Union, 1824), 미국기독교서회(the American Tract Society, 1825), 미국교육협회(the American Education Society, 1826), 미국절제운동협회(the American Society for the Promotion of Temperance, 1826), 미국국내선교협회(the American Home Missionary Society, 1826), 기타 더 많은 단체들을 조직했다. 이러한 기관들은 제2차 대각성운동의 영향력을 지속시켜주었다.
그리고 종교적 각성운동과 다양한 논쟁, 새로운 교파의 발생에 자극을 받아서 수많은 대학과 신학교들이 설립된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각성운동에 의해 고무된 감정적 분위기에서 이탈이나 왜곡으로 보여지는 몇몇 운동들이 나타났으며 신흥종교들이 생성되기도 했다. 윌리스턴 워커 외저; 송인설 옮김, 『기독교회사』, 729.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