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아 교회사] 기리시탄시대와 기리시탄다이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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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기리시탄시대와 기리시탄다이묘
본 연구의 목적은 기존연구를 검토하는 것을 중심으로 일본 기리시탄시대의 전래된 역사를 보는 것이다. 특히 일본과 스페인, 포르투갈의 관계를 중심으로 일본의 가톨릭 전래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유래되고 어떤 선교사가 어느 지방에서 활동했는지에 초점을 맞춰서 조사했다. 이에 더하여 선교로 인해 세례를 받고 기리시탄 다이묘(キリシタン大名)로 마지막까지 자기 신앙을 지켰던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과 기독교를 이용했던 그 당시의 통치자 도요도미 히데요씨(豊臣秀吉)의 관계도 살펴보고 이들의 관계가 현대에 주는 역사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Ⅱ.기리시탄 시대배경
기리시탄시대를 논할 때에 기리시탄국가(포르투갈, 스페인)와 일본전국시대(時代)의 시대배경을 빼놓을 수는 없다.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의 포르투갈은 포교보호권(布保護)을 원칙으로 한 ‘정교일체적인 체제’로 인도아대륙, Malacca, Macau에서부터 나가사키(長崎)까지 이르는 통상로를 개척한 후에 함대를 배치하여 해상왕국을 형성하였다. 또한 스페인은 신대륙을 지나 태평양을 건너서 필리핀을 정복하였다. 16세기의 일본은 1590년까지 포르투갈과 대부분의 통상관계를 가졌다. 水 紘一, 『織豊政とキリシタン ―日交の起源と展開-』(岩田書院, 2001), p.422.
국제적으로 포르투갈과의 무역관계를 살펴보면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중심으로 한 중국산 농산물과 일본에서는 주로 채굴되는 은과의 교역이었다. 실제로 일본은 포르투갈과 직접적으로 무역한 것이 아니라 마카오를 통한 중계무역방식으로 거래했을 뿐이었다. 高弘一朗., 『キリシタン時代の貿易と外交』( 八木書店. 2002), p.326.
기리시탄포교사업의 성격은 그 당시 포르투갈, 스페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세속적으로는 항해, 정복, 식민, 무역이라는 사업을 추진했고 동시에 가톨릭교회는 그 열려진 통로를 따라 포교활동을 통해 토착주민을 개교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 이질적인 교, 속( 俗) 2개의 사업이 포르투갈, 스페인의 양국의 국가적인 사업으로 진행이 되었고 그것은 로마교황의 주된 포교활동의 방식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로마교황의 권한 Grotius는 국제법의 아버지라는 별명이 있지만 그것은 유럽에 민족국가가 탄생하는 반면에 교황이나 황제가 이전의 지배적 권의를 상실하고 자주독립한 주권국가의 분쟁해결 때문에 하나의 규율의 확립을 구한 시대의 요구였기 때문이다. Groutius에 자극을 받고 반론하는 신학자 Freitas, Serafim de는 De Justo Impero Lusitanorum Asiatico 아시아에 관한 포르투갈 인의 정당한 지배라는 책을 1625년에 출판하였다. 제목대로 동인도에 관한 포르투갈의 권익을 그대로 보호하고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高弘一朗., 『キリシタン時代の文化と諸相』(八木書店., 2002), pp.547-577.
, 포교보호권의 제도였다. 로마교황에게 포르투갈, 스페인의 양국왕실은 신발견지에 대한 포교의 추진과 그 경제적인 부담을 지원하는 반면에 교회는 그 지역에 대한 행정, 인사를 주관할 수 있는 권리를 왕실에게 부여했다. 高弘一朗., 『キリシタン時代の文化と諸相』(八木書店, 2002), p.5.
 
이때까지 양국의 왕실은 이 시대를 이끌었지만 17세기에 돌아갈 무렵엔 국력도 점차 쇠퇴되었고, 그 시대의 중심은 서서히 영국, 네덜란드로 옮겨지고 있었다. 17시는 스콜라학적교설 대신 Grotius, Hugo Mare Liberum (The Free Seas)에 대표하는 학설이 새로운 시대의 지배적 지침이 되었다.
그것은 가톨릭적인 가치기준보다 더욱 보편적 타당성을 가친 합리적인 논리가 유리하게 되었다. 高弘一朗., 『キリシタン時代の文化と諸相』(八木書店, 2002), p.5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