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닉스 세미나] 한국선교 현장과 에큐메니즘 - 선교사 연합공의회와 교계예양의 신학적 담론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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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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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국선교 현장과 에큐메니즘
- 선교사 연합공의회와 교계예양의 신학적 담론을 중심으로
1. 들어가며
1884년 미국의 교파 교회가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한 이래, 19세기까지 한국에 들어온 교파는 미북장로회(1884), 미북감리회(1885), 영국 성공회(1889), 호주 장로회(1889), 미남장로회(1892), 미남감리회(1896), 캐나다 장로회(1898)로, 장로교 4개 교파와 감리교 2개 교파 그리고 성공회 하나, 이렇게 총 7개에 이르렀다. 다양한 신학적 배경을 가진 이들 교파들은 본국 선교본부의 예산과 정책을 바탕으로 한국에서 다양한 선교 사업을 진행해 나갔고, 각자의 교회와 학교를 세워 나갔다.
그러나 점차 이들은 한국이라는 동떨어진 시공간에서 제한된 인적 물적 자원을 가지고 선교사업을 해야 하는 개신교 교파들끼리, 불필요한 재원의 낭비를 막고 선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상호 협력해야 함을 느끼게 되었고, 이는 연합공의회의 결성이라는 현실적 결과를 낳게 되었다. 즉, 한국 선교현장에서 선교사들이 다양한 선교적 어려움을 겪을 때 “교파들의 옹졸함과 이기심과 질투와 교만이 서로간의 분열을 낳고, 선교지를 마비시키며, 에너지와 시간과 돈을 낭비케 한다” L. H. Underwood, “A Prayer for Unity,” The Korea Mission Field, vol. IX, no. 2 (1913.2), 23.
는 문제의식을 일찍이 절감하게 되었고, 이를 타개하고자 평화적인 연합사업을 꿈꾸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결성된 ‘재한 선교사 연합 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는 이렇듯 선교지에서의 필요에 의해 결성된, 즉 ‘선교 에큐메니즘’적 에너지에 의해 결성된 기구체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끊임없이 연합공의회의 궁극적 지향점과 나아갈 바에 대해 신학적 토론을 전개하였는데, 본 발제에서는 바로 이러한 선교사들의 신학적 담론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재한 선교사 연합 공의회’의 결성과정과 사업을 대략 살펴본 후, 구체적으로 어떤 신학적 논의들이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재한 선교사 연합 공의회’의 결성과 그 사업
교파들 간의 연합체를 결성하자는 움직임이 가장 먼저 태동한 곳은 장로교 교파들 사이에서였다. 1889년 호주 장로회가 내한하자 언더우드(H. G. Underwood, 북장로회)와 데이비스(J. Henry Davies, 호주 장로회)는 ‘미국과 빅토리아 교회 연합 선교회(The United Council of Missions of the American and Victorian Churches)’를 결성하였다. 곽안련,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 박용규, 김춘섭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120-121.
비록 데이비스가 몇 달 만에 천연두로 세상을 떠나면서 활동이 곧 중단되었지만, 교파간 연합 공의회가 처음으로 실체화 되었다는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 후 1892년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1893년에는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사이에 ‘장로회 정치를 쓰는 선교 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가 조직되었고 이후에 호주 장로교외 캐나다 장로교도 가입하였다. W. M. Baird, “Union of Presbyterian Missions in Korea,”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IV-7 (July 1895), 532.
감리교의 경우 남북 감리교 선교부가 장로교의 경우처럼 연합 협의 기구를 구성하지는 않았고, 각각 별도의 선교회를 운영하면서 교육 및 문서 사업 등 사안에 따라 협력하는 정도였다. 『韓國監理敎會史』, 基督敎大韓監理會 總理院敎育局 編 (서울: 基督敎大韓監理會 總理院 敎育局, 1975), 300-301.
선교사들이 하나의 공의회를 결성하고자 뜻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1903년 원산에서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이 함께 모여 성경 공부 모임을 가졌을 때 체험했던 부흥운동이었다. Louis H. McCully, “History of the Progress of Union in Korea,” KMF, vol. XV, no. 11 (1919. 11), 227-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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