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통일운동과 한국교회 -1980년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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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통일운동과 한국교회 -1980년대를 중심으로
I. 서론
한국 교회가 민족 분단의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대응하여 통일 논의와 운동을 활발히 전개한 것은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 이후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교회는 반공적 입장 이외에는 이렇다 할 의견이나 주장을 갖지 못했다. 그 후 1970년대 김재준을 비롯한 진보적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는 민족의 실체인 민중의 참여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밝힘으로 통일 논의를 한걸음 진보시켰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한국 교회의 대다수는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며 ‘선민주 후통일론’의 논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후 부패한 유신 독재 정권이 무너지자 1980년 민주사회를 기대하지만 한국교회의 민주화의 열망은 외세의 지원을 받은 새로운 군부세력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이에 한국교회는 민족 분단에 대한 근원적 요인의 인식(미국의 역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됨)과 더불어 통일운동의 실천 방안들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1981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분단국가로서 한국과 독일의 위상과 통일 전망을 논의하면서 구체적인 통일 문제에 대해 관심과 지원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 1989년 문익환 목사의 방북과 임수경의 판문점 통과는 그 극치를 이루었다. 그 결과 일시적으로 국내의 부수세력을 부추겨 공안정국을 만들게 했으나 한 편에서는 ‘우리의 소원’을 남북한이 열창토록 하였다. 민간의 이 통일 열기는 남북한 당국자의 그 동안의 선전적인 통일 정책을 더 이상 용납치 않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통일의 열망이 무르익기까지는 한국교회의 노력과 선교자적 사명을 감당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NCCK를 중심으로 WCC와 연합하여 한국교회가 통일운동을 어떻게 주도하고 전개하였는지 살펴보며, 특히 도잔소 회의나, 글리온 회담, “민족통일과 평화에 대한 기독교회의 선언”에 나타난 평화의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II. 통일문제에 대한 NCCK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는 한국교회의 연합정신을 구현하고 에큐메니컬 운동을 위하여 창설된 기독교 협의체를 말한다. 1924년 9월 24일 당시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연합 구축을 위하여 결성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서 시작되었으며 일제의 간섭으로 활동하지 못하였다가 1946년 재발족 하였다. 약칭은 NCCK(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이며 사회선교, 통일운동, 민주화운동 등의 기독교 사회운동을 해 왔기 때문에 대표적인 진보 기독교 단체로 평가받고 있다.
의 문제제기 연규홍, 『교회사의 해방전통』(한신대학교출판부, 2002), pp.215-217
1981년 “죄의 고백과 새로운 책임”이란 주제 아래 모였던 제 4차 한국,독일 교회협의회는 토의의 제일 큰 안건으로 통일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여기에서 한, 독 교회협의회는 공동 성명서를 내고 통일문제에 대한 양 교회의 참여적 책임의식을 표현하였다. 특히 여기서 한국 교회는 같은 분단 상황 속에 있으면서도 독일과는 상이한 분단의 문제들을 전재하고 통일의 주체인 민중이 배제되지 않는 통일 논의를 전담 연구할 “통일문제전문연구위원회”의 설치를 제안하였다. 그 결과 한국기독교회협의회(NCCK) 내에 “통일문제연구원 운영회의”를 상설 기구로 조직하고 통일문제를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해 가게 되었다.
이때 한, 독 교회협의회 공동 성명문에서와 같이 NCCK의 통일 논의는 자유와 정의가 보장된 평화스러운 통일을 지향했다. 그러나 통일문제에 대하여 폐쇄성을 가지고 전면적 참여를 배제한 정부는 이러한 선언적 평화에 대한 NCCK의 인식을 더 이상 진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NCCK는 정부의 독점적, 폐쇄적 통일논의의 허구를 넘어선 민족 전체의 자주적 역량에 의한 통일의 필요성을 자각한다. NCCK는 또한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려는 평화적 운동으로써 통일을 원하신다는 차원에서 이해하게 된다. 즉 평화적 통일은 민족의 국토 분단을 극복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강대국들이 빚어낸 이념대립체제의 모순을 깨고 세계 질서를 개편하는 평화 운동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1983년 를 통해 NCCK는 한반도의 민족통일이 한민족만의 통일이 아닌 세계의 갈등 구조와 지배 체제의 모순들을 해결하는 평화와 직결된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그 인식의 변화를 표면적으로 나타냈다.
NCCK의 통일운동 방향정립은 선진자본주의권의 교회들의 평화 운동 이론들과 연계되어진다. WCC는 1983년 제 6차 총회 주제를 “예수 그리스도-세상의 생명”으로 정하고 평화를 단순한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닌 정의가 현존하는 상태로 인간의 자기 실현과 해방, 온전성이 실현되는 공동체적 개념으로 이해하게 되는 인식 전환을 가져오게 하였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세계의 평화로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이 평화를 더욱 구체적으로 JPIC(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을 위한 운동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정의하였다.
그 후 WCC는 이러한 평화 운동을 결의한 구체적 실천사항의 하나로 1984년 ‘동북아시아 평화와 정의에 관한 협의회(Consultation on Peace & Justice in North-East Asia)’를 일본의 도잔소에서 열어 한반도 통일 문제를 세계 교회의 평화의 운동의 차원에서 토론하게 되었다.
III.통일운동과 평화운동의 주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의 역사 3』(기독교문사, 2009), pp.248-250
우리 사회는 민간 차원의 통일 논의를 통제해 온 정치적 상황으로 민족분단에 대해 전반적으로 무관심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초반부터 남한 사회에서 자유와 사회정의를 구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하자는 주장이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 되었다. 남북통일을 위한 기독교인의 과제는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동시에 우익독재나 독점 자본주의와도 대결”하는 것으로 제시되었다. 이것은 기존의 북한에 대한 결투와 같은 전투적사고와는 다른 것이었고 통일을 위한 반공주의적 사고에 반하는 전환점과도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