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회사] 한국에서의 교회와 국가(조선후기, 개화기, 일제시대 등)

 1  [한국기독교회사] 한국에서의 교회와 국가(조선후기, 개화기, 일제시대 등)-1
 2  [한국기독교회사] 한국에서의 교회와 국가(조선후기, 개화기, 일제시대 등)-2
 3  [한국기독교회사] 한국에서의 교회와 국가(조선후기, 개화기, 일제시대 등)-3
 4  [한국기독교회사] 한국에서의 교회와 국가(조선후기, 개화기, 일제시대 등)-4
 5  [한국기독교회사] 한국에서의 교회와 국가(조선후기, 개화기, 일제시대 등)-5
 6  [한국기독교회사] 한국에서의 교회와 국가(조선후기, 개화기, 일제시대 등)-6
 7  [한국기독교회사] 한국에서의 교회와 국가(조선후기, 개화기, 일제시대 등)-7
 8  [한국기독교회사] 한국에서의 교회와 국가(조선후기, 개화기, 일제시대 등)-8
 9  [한국기독교회사] 한국에서의 교회와 국가(조선후기, 개화기, 일제시대 등)-9
 10  [한국기독교회사] 한국에서의 교회와 국가(조선후기, 개화기, 일제시대 등)-10
 11  [한국기독교회사] 한국에서의 교회와 국가(조선후기, 개화기, 일제시대 등)-11
 12  [한국기독교회사] 한국에서의 교회와 국가(조선후기, 개화기, 일제시대 등)-12
 13  [한국기독교회사] 한국에서의 교회와 국가(조선후기, 개화기, 일제시대 등)-13
 14  [한국기독교회사] 한국에서의 교회와 국가(조선후기, 개화기, 일제시대 등)-14
 15  [한국기독교회사] 한국에서의 교회와 국가(조선후기, 개화기, 일제시대 등)-15
 16  [한국기독교회사] 한국에서의 교회와 국가(조선후기, 개화기, 일제시대 등)-16
 17  [한국기독교회사] 한국에서의 교회와 국가(조선후기, 개화기, 일제시대 등)-17
 18  [한국기독교회사] 한국에서의 교회와 국가(조선후기, 개화기, 일제시대 등)-18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한국기독교회사] 한국에서의 교회와 국가(조선후기, 개화기, 일제시대 등)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국에서의 교회와 국가

제 1 장 서 론
제 2 장 조선후기의 교회와 국가
제 3 장 개화기의 교회와 국가
제 4 장 일제시대의 교회와 국가
제 5 장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하에서의 교회와 국가
제 6 장 제2공화국에서의 교회와 국가
제 7 장 박 정희 정권하에서의 교회와 국가
제 8 장 결론
◈ 참고문헌 ◈
제 1 장 서 론
국가와 정부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는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고정 또는 일정 되어 있지 않아서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 또는 교회와 정부와의 관계를 다루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 일찍이 종교개혁기에 루터는 국가와 정부를 인간의 타락에 대한 대책으로 생각하고 무실서와 혼란을 힘으로 막고 사회를 파괴로부터 구하기 위하여 마련된 것으로서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마련된 교회와는 독립된 별도의 하나님의 대리기관으로 보았다. 그가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종교주도형의 신정체제의 폐단을 통감하고 국가와 그 기능을 교회의 지배로부터 독립시켜서 자유롭게 만드는데 공을 세운 것이다. 칼빈은 인간의 타락을 중대시하면서도 루터처럼 국가와 정부가 인간을 감시하고 벌하는 경찰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생각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하나로서 국가를 인정하였다. 칼빈은 사람이 정치적 질서를 지킬 능력과 도덕법을 가지고 있어서 자연적으로 사회를 형성하여 유지할 수 있는 존재이며, 왕들의 권리는 인간의 타락의 결과로 마련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와 거룩한 제도에서 온 것이라고 말하였다. 국가에 대한 위의 두 가지 개념 가운데서 현대 신학자 에밀 브루너의 사상은 루터의 견해에 가깝다. 즉 그는 국가는 원죄의 결과로 생긴 필요한 기관이며 이러한 국가는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며 사람들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며, 국가의 본질은 복종을 강요하는 권력의 소요에 있다고 말하였다. 반면에 칼 바르트는 국가를 강제력의 한 기구로 보지 않고 그의 그리스도론적 신학을 가지고 국가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업의 한 도구로서 사용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장식, 『기독교와 국가』,(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2), 9-10
한국기독교회사에 있어서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조선후기의 교회와 국가, 개화기의 교회와 국가, 일제시대의 교회와 국가, 미군정이승만 정권하에서의 교회와 국가, 419 이후 516 사이의 1년 남짓 밖에 안 되지만 중요한 의의를 갖는 제2공화국에서의 교회와 국가, 박 정희 정권하에서의 교회와 국가로 나누어 고찰해 보고자 한다..
제 2 장 조선 후기의 교회와 국가
제 1 절 교회와 국가에 대한 인식
천주교가 수용될 당시 조선왕조에서는 성리학을 정학(正學)으로 인정하여 이를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 정학에 위배되는 사상체제에 대해서는 규제하는 정책을 펴 왔다. 따라서 조선왕조는 불교나 민간신앙 들을 이단사설로 규정하여 이에 대한 탄압을 자행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조선 성리학이 전통적으로 견지해 오던 척사위정론적 입장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조선 성리학의 척사위정론은 이질적 사상을 배격하는 데에 널리 적용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왕조에 새롭게 전래된 천주교 신앙도 이 척사위정론의 연장선상에서 조선 성리학으로부터 배척받게 되었다. 조광, “조선후기의 교회와 국가”, 오경환 외, 『교회와 국가』,(인천:인천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7), 519-520
조선후기 신도들은 천주교 교리에 입각하여 당시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평가했던 충효를 상대화시켰으며, 기존하던 남성과 여성의 관계나 사회신분제에 대해서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이러한 그들의 비판이 현실적으로는 국가 내지 국왕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교회는 국가로부터 배격 받고 탄압을 감수해야 했다. 조광, “조선후기의 교회와 국가”, 533
제 2 절 국가의 교회에 대한 인식
조선 정부의 당국자들은 이미 왕조가 세워진 직후부터 성리학적 가치관 이외의 여타 사상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을 명백히 해 왔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사상통제 정책은 18세기 후반기에 이르러서도 지속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전통적인 ‘벽이단척사학’(闢異端斥邪學)이나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입장에서 천주교의 신조를 인식했고, 이를 일종의 이단사설(異端邪說)이나 민중종교로 파악했다. 또한 천주교를 전근대적인 왕조질서를 지탱하는 양대 지주인 충과 효를 거부하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즉, 천주의 권위에 절대적 가치를 두고 왕명과 부권을 상대화하는 천주교도의 행위는 왕과 부친의 존재를 인정치 아니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천주교 신앙을 “임금을 배반하고 어버이를 멸시하는 것”으로 규정하였으며, 이 ‘무부무군’을 주장하던 것으로 간주된 천주교의 폐단을 불가(佛家)나 노자(老子), 양자(陽子), 묵적(墨翟)의 폐단보다 더 심한 것으로 파악했다. 그리하여 정부당국자들은 성리학적 가치체계의 보존과 이에 근거한 사회구조의 유지를 위해서는 천주교 신앙을 배격해야 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선후기 사회에서 단행되었던 천주교 탄압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으며, 조선후기의 천주교가 가지고 있던 사회사상적 특성의 일단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조광, “조선후기의 교회와 국가”, 533-534
제 3 절 국가의 천주교 전파에 대한 대책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