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일제하 한국 기독교의 민족운동 - 교회와 국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일제하 한국 기독교의 민족운동
교회와 국가
1. 서론
식민사회는 일반적으로 식민지권력에 의해 공식적인 모든 조직이 장악되거나 해체되기 때문에 조직적 네트워크의 공백의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식민지하의 종교단체들은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종종 종교단체가 그 식민사회의 민족운동에서 몇 안 되는 제도적 공간으로 등장하게 된다. 구소련 식민지하 폴란드의 정교회의 경우처럼 근대 이후 역사에서 이런 실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런 현상은 한국의 일제강점기에도 나타난다. 1910년대 일제가 소위 ‘무단통치’라는 엄격한 군사통치를 취할 때, 국내 유일의 합법적 조직은 기독교천도교불교 등의 종교조직이었다. 이는 왜 31운동이 종교지도자들의 주도 아래에 일어났는지를 일면 설명해준다. 일제는 끊임없이 종교에 대하여 경계하고 탄압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교인들이 외국선교사들을 매개로 서구열강 및 세계여론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전면적 통제와 예속에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일제하 한국 기독교는 근대 민족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그리고 가장 마지막까지 펼쳐지는 공간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김권정, “19201930年代 한국기독교인의 민족운동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식」 47호 (2001. 3): 10.
본 소고는 일제하 한국 기독교의 민족운동의 성격을 살펴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 특히 기독교 세력의 민족운동의 성격과 주도세력이 일제의 무단통치기, 문화통치기, 그리고 소화 파시즘기에 따라 어떻게 구별되는가 徐正敏, “日本統治期における韓キリストの民族運動朱基徹牧師を中心として,” 주기철 목사 순교 기념 특강, (2008. 12. 12).
에 관심하고자 한다.
2. 초기 - 이데올로기적 민족운동기 (구한말과 무단통치기)
기독교가 수용되던 시기의 한국은 중세 말기의 모순과 부패로 사회적인 취약점이 드러나고 있었고,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국가들의 침탈의 위협에 놓여있었다. 이런 시기에 사회적인 취약점과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근대사회를 이룩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대내적으로는 반봉건, 대외적으로는 반외세를 위한 사회개혁이 필수적이었다. 이만열,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한국기독교와 역사」 18호 (2003. 2): 115-120.
당시의 이 같은 민족적인 과제는 기독교를 수용하는 엘리트 계층이 기독교를 철저하게 새로운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인식하게 되는 바탕이 되었다. 이들은 기독교를 부국강병과 관련시켰다.
서양 각국에 구세주를 숭봉하는 나라들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고로 법률을 실시하고 정치가 분명하여 백성이 요족하고 나라가 부강하며…… 「獨立新聞」 3-224 (1898. 12.24)
또한 당시 한국은 기독교 선교국가와 제국주의 침략국가가 일치하지 않는 독특한 구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당시 엘리트 계층이 기독교라는 하나의 사상, 혹은 정치적 세력을 민족의 주권을 지키거나 되찾으려는 방편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분명히 기독교의 초기 수용기의 분위기는 기독교의 종교성 보다 정치성, 사상성에 중점이 있었다. 서정민, “한국기독교의 현상에 대한 역사적 검토,”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272회 학술발표회 주제발표 1(2009. 3.7): 2.
기독교를 받아들인 엘리트 계층은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 정치사회세력화를 도모해 나갔다. 그러다 1900년대 초반 정치범으로 투옥된 인사들(이승만(李承晩), 신흥우(申興雨), 이상재(李商在), 이준(李儁) 등등)이 옥중에서 집단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하고 이동휘(李東輝)를 비롯한 청년지사들이 외세에 맞서고자 교회로 찾아오면서 그 진용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일제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이들의 운동은 개화개혁운동에서 국권회복운동항일민족운동으로 변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