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무교회주의 논쟁

 1  1930년대 무교회주의 논쟁-1
 2  1930년대 무교회주의 논쟁-2
 3  1930년대 무교회주의 논쟁-3
 4  1930년대 무교회주의 논쟁-4
 5  1930년대 무교회주의 논쟁-5
 6  1930년대 무교회주의 논쟁-6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1930년대 무교회주의 논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930년대 무교회주의 논쟁
들어가는 말.
무교회주는 1920년대 한국. 일본에서 전개된 교회 혁신운동으로 성서중심의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기독교 사상으로,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가 1907년에 만들어 낸 신앙적 입장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우리는 무교회주의 논쟁에 대해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무교회주의 사상과 배경, 그리고 성서조선 이란 잡지를 통해 한국 교회의 새로운 신학 운동을 일으킨 김교신과 그가 주장하는 무교회주의 대하여 알아보고 논쟁점을 통하여 논평하기를 바란다.
서론.
1. 무교회주의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 라는 것은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1861-1930)가 1907년 3월에 그가 창간한 《성서의 연구》(聖書之硏究)에 「무교회주의의 전진」이라는 글 속에서 이 단어를 만들어 씀으로써 사용하게 된 신앙적 입장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우찌무라는 무교회주의를 루터의 종교개혁을 보다 철저화시킨 제2의 종교개혁으로 이해했다. 우찌무라는 루터의 종교개혁은 “저지된 운동으로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한계를 가진 종교개혁에 그 근본을 둔 프로테스탄트의 제교파는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중심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각각의 우상-성서, 교의 일종의 도그마를 잔존시킴으로써 로마교회로 회귀하여 버렸다고 우찌무라는 인식했다. 여기서 우찌무라는 현재의 그리스도교에는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찌무라가 말하는 제2의 종교개혁이란 인간의 율법적 행위에 의한 ‘의인(義認)’의 추구를 일절 배제하고 단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신앙만의 신앙’을 관철하는 것, 또한 ‘프로테스탄트주의를 논리적 귀결까지’ 철저화시킨 ‘만인사제주의’를 관철하는 것이었다.
우찌무라의 교회론은 마태복음 16:18의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말씀을 근거로 삼고 있다. 여기에서 ‘교회’라고 번역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밖으로 불려내어진 자들의 집합체’ 라는 의미로, 원래 국회 내지는 시회(市會)와 같은 보통 사람들의 모임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이 에클레시아는 영어의 “Church” 나 독일어의 “Kirche” 와는 어원이 다르다. 왜냐한면 “Church" 와 ”Kirche“ 는 그리스어의 쿠리아콘, 즉 ‘주(神)의 집’ 이라는 의미의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신전과 같이 순수하게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2.김교신과 성서조선
김교신(1901-1945)은 1901년 4월 18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하여, 1918년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다음해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동경 정칙 영어학교에 입학, 공부하던 중 자아에 대한 심각한 회의와 갈등에 빠졌다. 그러던 1920년 4월 16일 저녁 동경 시내에서 우시고메구 야라이 거리를 지나다가 동양 선교회 재학생 송전이라는 청년의 노방 설교에 깊이 감동이 되어서 4월 18일에 동경의 야라이 호리네스 교회에 출석 하였다.
이후 6월 27일에 그 교회에서 청수준장 목사에게 침례를 받고 매 주일과 목요일 성서 연구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출석 하였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던 교회는 세족적인 이권 투쟁에 전념했고 마침내 목사를 추방한 사건이 일어났다. 김교신은 교회의 내분에 실망하여 1920년 11월 교회를 떠났다. 정신적인 방황의 날들을 보낸 다음 우연히 손에 잡혀서 탐독한 책이 내촌감삼의 책인 ‘구안록’, ‘종교와 문학’, ‘성서지 연구’ 등을 숙독하여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는 다음해 1월부터 내촌의 성서연구 모임에 나가기 시작하여 이후 7년 간, 즉 1927년 까지 로마서 강의 등 내촌의 성서 연구 집회에 열심히 출석하여 강연을 경청함으로써 그의 신앙과 사상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또한 1925년부터 내촌문하의 조선인 유학생 6명이 모여 ‘성서 연구회’를 만들어 희랍어를 배우면서 원문으로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동인들이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양인성 등이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