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의 아우라는 진정 해체되었는가 -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통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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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사진속의 아우라는 진정 해체되었는가?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통찰과 관련하여
최초의 인간은 언제 아름다움을 느꼈을까? 그것은 아마 자연에서 느낀 아름다움이 최초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분명 자연도 최초에는 두려움으로 다가왔겠지만 점차 자연의 규칙성을 발견하고 그 무한한 반복에 경외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점차 인간기술의 발달에 따라 인위로 만들어 낸 제사의식도구를 통해 종교적 아름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기술이 발달하면서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은 점차 인간의 삶과 융화된다. 나뭇잎에 음식을 담아 먹던 시기에는 변형을 주기가 어렵지만, 토기를 사용하던 시기에는 인위적 변형을 통해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더 쉬워졌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점차 인간 삶의 일부가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일상과 동떨어져 있었다. 회화나 연극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일상에서 계속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단 한번의 경험일지라도 낯설게 다가오고, 그 결과 큰 감동을 주기도 하였다. 이것이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의 개념이다.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유물론적 예술론의 사상적 특징을 보인다. 이 글에서 벤야민은 복제기술의 발전이 예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주목한다. 마르크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분석에서 출발하여 자본주의의 미래를 예견했듯, 벤야민도 예술의 생산 조건의 변화가 예술의 미래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지 살펴보았다. 벤야민에 따르면 예술의 생산방식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기술적 복제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예술작품은 언제나 복제가능했지만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는 19세기 사진술과 영화의 탄생으로 이제까지 예술이 지녀왔던 성격을 총체적으로 변화시킨다.
그렇다면 사진과 영화와 같은, 기술 복제 시대의 새로운 예술의 등장은 전통적인 예술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벤야민은 그것을 한마디로 아우라의 상실이라고 말한다. 아우라란 어떤 대상이 지니고 있는 그만의 독특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이다. 예술작품이 아우라를 지니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대상의 객관적 속성, 그것이 진품이라거나 일회적이라거나 원본이라는데서 오는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등장한 새로운 복제기술은 전통적 예술작품이 갖고 있었던 유일무이한 현존성과 진품성을 무가치하게 만들어버렸다. 사진이나 영화, 또는 음반과 같은 기술 복제 시대의 새로운 예술은 수많은 복제본의 생산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이러한 예술에서는 애초부터 원본과 복제본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처럼 전통적 예술작품이 지니고 있던 아우라의 상실이야말로 오늘날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을 특징짓는 핵심적인 지점이 되었다.
벤야민은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대상이 지니는 객관적 속성과 관련시켜 설명할 뿐만 아니라, 아우라를 경험하는 인간의 지각작용과 연관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이 경우 아우라는 대상의 특정한 속성에서 기인하기 보다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주관적 경험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벤야민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아우라적 경험이란 나와 대상의 경계가 순간적으로 해체되는 경험, 즉 미메시스적 유사성이 성립되는 순간이라고 정의내린다. 즉 나와 대상의 시선의 교환, 이러한 상호과정 속에서 주체와 대상 모두가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교감을 나누게 되는 순간에 바로 아우라적 경험이 이루어진다.
아우라는 접근성의 측면에서도 이야기 될 수 있다. 종교적 수단으로 예술작품이 사용되는 경우, 작품이 주는 감동의 극대화를 위해 평상시에는 사람이 볼 수 없는 곳에 작품을 감추어 두곤 했다. 『플랜더스의 개』의 넬로는 죽기 전 루벤스의 그림을 보았을 때 “신이시여, 이제 충분해요”라는 말로 영혼의 체험을 토로한다. 이때 넬로가 느낀 감동과, 오늘날 우리가 인터넷에서, 혹은 실제로 루벤스의 그림을 보았을 때와는 다를 것이다. 넬로의 말 속에는 아우라에 대한 체험이 녹아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보면 예술작품의 아우라는 미적체험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가 아닐 수 없다. 벤야민은 아우라의 상실이 예술의 정치적 기능전환을 위한 긍정적인 지점으로도 읽히며, 어떤 경우에는 진정한 미적 체험의 가능성이 붕괴해버린 부정적인 지점으로 그려진다. 즉 대체적으로 찬탄하면서도 때로는 아쉬워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의 복제기술은 복제품을 대량생산함으로써 일회적 산물을 대량으로 제조된 산물로 대치했다. 그 결과 대량생산된 복제품은 수용자들이 그때그때 개별적 황에서 복제품을 대면할 수 있게 했다. 벤야민은 이를 복제품의 현재화라고 지칭한다. 예전에는 미술관 안에서만 볼 수 있던 그림을 내가 원하는 곳 어디든 걸어놓고 감상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음악은 내가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게 거리를 놀랄 만큼 단축시켰다. 사물을 공간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자신에게 가까이 끌어오고자 하는 것, 나아가 복제를 통해서 그것을 자신 바로 옆에 두고 소유하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은 오늘날의 대중이 갖고 있는 열렬한 욕구이다.
아우라를 지닌 전통적 예술작품이 종교적 제의에 봉사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면, 아우라를 잃어버린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더 이상 제의적 숭배가치에 중점을 둘 수 없다. 벤야민은 숭배가치를 강조하는 예술의 전통이 세속적인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형태로 계승되어 르네상스 이래 300년 동안 지속되어왔다고 말한다. 이 점에서 벤야민은 예술의 자율성과 예술지상주의에 이르는 근대의 세속적 예술이 여전히 아우라를 통한 숭배 가치를 본질로 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종교 예술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벤야민은 세속적인 아름다움의 숭배가 그 근거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바로 최초의 혁명적인 복제수단이라 할 수 있는 사진술이 등장하면서부터라고 말한다. 예술작품의 기술복제가능성은 역사상 처음으로 종교의식 속에서 살아온 기생적 삶의 방식으로부터 예술을 해방시켰다. 아우라를 상실해버린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은 더 이상 숭배가치가 아닌 전시가치의 대상으로 등장하게 된다.
벤야민은 숭배가치로부터 전시가치로의 이행을 사진이라는 새로운 예술 형태 속에서 찾아낸다. 물론 사진에서도 숭배가치는 최후까지 남아서 저항했다. 그 이유는 초기 촬영 기술의 한계 때문에 생긴 미묘한 회하적인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 인물 사진이라는 그 내용 때문이기도 했다. 즉 예술작품의 숭배가치는 멀리 있거나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을 추억하는 인물사진의 의식적 인위 속에서 마지막 도피처를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진에서조차 사람의 모습이 뒷전으로 물러서자 비로소 전시가치가 숭배가치를 앞지르게 된다. 벤야민은 이를 20세기 초반 파리의 거리를 범죄 현장 기록하듯 찍어냈던 아제의 사진에서 확인한다. 아무런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 아제의 사진이야말로 비로소 진정한 아우라의 몰락을 예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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