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 탄생 - 찰스 암스트롱 - 북한연구주요저작강독 - 북한 초기 국가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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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북조선 탄생
찰스 암스트롱
찰스 암스트롱의 『북조선 탄생』은 북한의 초기 국가형성에 관한 연구이며, 연구시기는 1945년 8월 식민지 해방 직후부터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의 북한의 정치, 문화, 경제, 사회적 변화에 관한 총체적 연구이다. 찰스 암스트롱은 그의 책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소련점령 당국의 지시로 만들어진 외부로부터의 혁명 이상의 무엇, 즉 당시의 지역적 상황과 근세의 역사적 유산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암스트롱은 책에서 네 가지 연구주제를 다룬다. 첫째, 공산주의 지향의 정권건설에서, 점령국이었던 소련의 영향과 지원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수립 직후 북한공산주의가 토착화 딜 수 있었던 북한체제의 독특한 조선식 요소들에 대해 다룬다. 이러한 토착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는 조선민족주의를 들 수 있다. 둘째, 1945년 해방 이전의 역사와 정치문화의 중요성을 다룬다. 북한체제는 독특한 방식으로 현대적 형식과 ‘전통적인’ 것을 결합한 상징과 권력구조를 통해 작동하고 있다. 암스트롱은 스칼라피노와 이정식이 1945년 당시의 한국에서 “성공적인 공산주의혁명에 필요한 일반적인 요건들”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한 것은 한국에서의 공산주의가 조선의 뿌리 깊은 보수 사회의 위계적 구조와 유교적 사회가치에 의해 흡수되고 변형되었다는 점을 무시한 것으로써, 공산주의는 조선사회가 너무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분한에서 부분적으로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셋째, 북조선혁명의 전체주의적 야심을 강조한다. 격동의 5년 동안 북한에서 사회관계, 문화, 예술, 그리고 일상생활은 격렬한 전환의 대상이었으며, 이런 점에서 북한의 공산주의 적응은 조선 초기 유교화와 어느 정도 비교될 수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암스트롱은 이성계와 개국공신들을 김일성과 북한의 지도자들에 비교하며 이들이 위로부터의 총체적인 사회전환을 시도했다고 밝힌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선조들과 극명하게 다른 점은 북한의 지도자들은 사회 밑바닥의 사상과 요구를 결합시키기 위해 고심했다. 그것은 새로운 정치체제였으며 사회, 경제활동, 문화, 그리고 일상생활의 재질서였다. 그리고 이것은 경제파탄과 기아의 고통 등 거듭되는 붕괴의 전망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지금까지 버텨낼 수 있었던 강고함과 내구성의 원천이 되었다. 그러나 하향식 정책집행과 포괄주의 및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에 대한 집착은 조선시대의 그것과 상당한 유사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암스트롱은 주장한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 주제는 인민들 사이에 새로운 집단적 정체성을 만들고자 했던 북한의 노력이다. 북한 정부는 해방과 전환의 대상이었던 인민들 즉 빈농, 노동자, 여성, 그리고 청년 등에 대한 여러 정책의 효과에 보다 주목하여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였다.
암스트롱은 서장에서 위의 네 가지 주제를 통해, 이 책의 주요 관찰대상은 북한의 리더십 정치가 아니 북한 지도부의 출신배경과 이가 정책 결정에 미친 영향력임을 분명히 밝혀두고 있다. 특히 1930년대 만주에서 항일 유격투쟁에 적극적이었던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에 주목한다고 밝히며, 북한 정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은 바로 김일성과 그의 가까운 동지들이었다고 서술한다. 1950년까지 그들은 북한체제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만주에서의 유격대 경험은 근본적으로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의 세계관을 형성했고, 이 경험은 정권이 설립되자마자 책, 팸플릿, 노래, 영화로 만들어져 선전되었고 그것은 북한 기원의 신화가 되었다고 암스트롱은 밝힌다. 이런 이유로 만주유격대활동에 대한 역사적 이해는 북한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라는 것이 암스트롱의 입장이다.
1945년 이전, 특히 1930년대 조선 북부지방과 조·중 국경에서의 중국공산당 동북항일연군의 활동과 프로그램을 살펴본다. 동북항일연군에는 북한의 권력을 장악한 김일성과 조선인 활동가들이 속해 있었다. 1945년 이후 북한정치를 지배하게 된 이들은 김일성과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에 참가했던 세력들이었다. 그 결과 만주에서의 빨치산 경험은 그 후 수십 년 동안 북한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북한지역에서는 지역적 특성에 의하여 항일저항운동이 지속될 수 있었다. 특히 동북지역은 반란의 열린 공간이었다. 강력한 사회적 연줄망이 존재했고, 지주에 대한 종속이 약했으며, 중앙의 간섭에 저항했던 전통이 함경도 지역의 농민들이 급진시위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항일 무장투쟁이 지속된 유일한 지역은 변방에 위치하고, 험준하며, 정치적으로 모호한 동북지역의 조·중 국경지대였다. 일본은 항일 게릴라 활동을 근절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반란군을 평정하는 방법과 그들의 대중적 기반을 와해시키기 위한 지역사회 재건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일본의 집단부락정책은 만주에서 빨치산 토벌을 위한 일본의 주요 사회정책이었다. 이는 농민들의 깊은 반심을 샀다. 김일성은 만주에서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암스트롱은 김일성의 러시아에서의 망명시기보다 중국과 만주에서의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비슷한 환경의 조선에 그 경험을 적용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민생단 사건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운동과정에서의 자주성을 주장하고 또한 해방 이후 중구고가의 밀접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민족 자주를 강조하는 근거가 된다고 밝혔다. 김일성은 만주의 유격대 기지 시절 토지개혁, 통일전선 정치, 그리고 사회개력 등을 비롯한 많은 조치들을 이미 시행하였다.
일본의 항복 직후인 1945~1946년 가을과 겨울 동안의 조선인 자치시기 및 소련점령 하에서 사실상 북한정권이 등장하는 장면들을 살펴 본다. 1945년 일본 식민지로부터의 갑작스러운 해방은 조선에 거대한 정치공간을 만들어 내었고, 조선에 큰 혼란을 불러왔다. 하지만 북한의 경우, 새로운 질서의 창출이 남한보다 빠르고, 더욱 규제되고, 보다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북한에서는 전국 도처에서 인민위원회가 생겨났다. 특징은 인민위원회라는 정권형태는 중앙으로부터 하향식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밑으로부터 상향식으로 조직되었다는 점이다. 이 조직은 소련의 지도보다는 조선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스탈린의 목표는 소련영토에 대한 공격을 막고 조선의 경제적 자원으로 이익을 얻기 위해 북쪽에 우호적인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소련은 북한사회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를 할 필요가 없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급진화를 향한 동력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 스스로부터 나왔다. 김일성과 같은 젊은 열성분자들이 소련 당국으로 하여금 보다 철저한 변화를 추진하도록 만들었고, 결국 남쪽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선택하도록 하였다. 소련 군정에 대한 반항으로 1945. 11. 23. 신의주사건이 일어났는데 김일성은 이 기회를 잘 이용했다. 그는 신의주에서 사회적으로 포괄적이면서도 정치적으로 규율이 선 대중정당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김일성은 효과적인 중앙정부를 평양에 창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는 1946년 5도행정국의 지도자들, 정당과 사회단체의 대표, 지방 인민위원회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임시 인민위원회의 필요성에 대해 연설하였다. 이 회의에서 중앙정부 행정기구를 만들기로 만장일치하였고, 김일성은 의장으로 하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창설되었다. 이는 분단국가를 향한 북한지역에서 일어난 결정적인 첫 번째 단계였다.
1946년 봄과 여름 광범위하게 일어난 사회개혁의 실행에 대해 살펴본다. 또한 사회계층과 정체성의 문제 및 농민·노동자·청년·여성 등 당과 국가에 의해 동원되어 새롭게 권력이 주어진 사회적 주체의 해방이라는 문제에 대해 알아본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46년 봄과 여름에 걸쳐 토지개혁, 새로운 노동법령, 남녀평등법의 제정, 주요 산업의 국유화 등 ‘민주개혁’을 시작하였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입장에서 볼 때, 근본적인 사회개혁은 하위계급의 정치참여를 추동하고 그들로부터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매우 핵심적인 일이었다. 토지개혁은 그 중에서도 핵심이었다. 북한 토지개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유혈사태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주로 농업 집단화에 비해 ‘토지를 농민에게’라는 정책이 갖는 상대적 온건성과 지주들에게 남한이라는 피난처가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의 개혁과정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개혁은 민주적, 애국적, 그리고 반일이라는 광범위한 기치로 묘사되었다. 노동자와 청년, 여성 단체를 위한 법들도 제정되었고 이들의 사회적 위치를 높이기 위한 국가적 노력도 계속 되었다. 특히 여성의 경우에는 빈농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정치지형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는 억압받는 다수였다. 이런 억압받는 계층에 대한 대우를 개선해주는 것이 북한정부의 정책이었다. 그렇다고 신현대적인 측면에서 여성을 대한 것은 아니다. 성문제는 보다 넓은 정치경제적 목적에 종속되었고, 여성권리의 신장과 가족에 대한 비판은 때때로 사회주의적 연대라는 명분으로 억제되었다. 북한 여성의 두가지 역할은 전투적인 민족주의자가 되는 것과 혁명의 아들을 낳는 것이었다. 북한체제는 자유의 수준은 높지 않았고, 오히려 1945년 정권이 등장하면서 많은 내부 비판자와 반대자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최소한 한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정권은 약속을 지켰다. 사회계급의 밑바닥에 있던 자들을 특권적 위치로 올려놓았고, 반대로 과거의 특권층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은 것이 그렇다.
반면 4,5,6,7장에서는 북한이라는 새로운 체제가 어떻게 전체적으로 작동되었는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다양한 시각에서 북한체제를 종합하려 시도하였다. 중앙과 지방 차원, 지방 인민위원회와 같은 정치조직, 세 개의 주요 정당(조선로동당, 조선민주당, 천도교청우당)간의 상호작용, 그리고 지방의 정치참여와 선거를 다룬다. 이러한 요소들이 국가와 군부가 전체주의 체제로 성립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3당의 통합의 목적은 북조선에서의 사회개혁과 남한에서의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을 지원하며 또한 남북통일을 추진하기 위해 북조선 주민 절대다수를 이끌어내려는 것이었다. 당이 사회를 위로부터 연계하는 데 성공했다면, 정치체제를 아래로부터 통합한 것은 인민위원회를 통해서였다. 이는 북한 정치의 형성 과정에 있어서 위로부터와 아래로부터의 변증법을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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