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대량살상무기와 일본의 군사력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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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와 일본의 군사력 강화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와 일본의 군사력 강화
< 목차 >
Ⅰ.들어가는말
Ⅱ.북·일관계
Ⅲ.북한의 대량살상무기
(1).북한의 미사일개발
(2).북한의 핵개발
Ⅳ.일본의 군사력강화
(1).정책적변화
(2).군사력현황(2006년 기준)
Ⅴ.나오는말
Ⅰ.들어가는말
1947년 5월 시행되어 63년동안 지속되온 일본 헌법이 18일 개정을 향한 첫 발을 내딛는다. 헌법개정 절차를 규정한 국민투표법이 이날부터 시행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자민당이 2005년 신헌법초안대로 ‘자위군’을 헌법에 명기해 명실상부한 군대 보유를 요구할지 주목된다. 최근 일본 여론조사에서 개헌에 대해서는 찬반이 거의 반반이었지만 ‘군대 보유 금지’를 명기한 헌법 9조 개정은 반대가 70%에 육박했다고 한다. 한국일보 2010.05.17
이러한 일본의 변화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크게 2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바로 중국의 급부상이다. 아시아에서 패권적 지위를 점유하던 일본은 장기침체에 허덕이고 있는 동안 개방과 함께 급성장한 중국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 중국의 경제력은 몇 년 내로 일본을 추월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급속한 경제성장과 함께 재래식으로만 평가받던 중국 군사력부문에서도 최신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두 번째는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이다.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고 있는 북한은 핵무기보유에 그치지 않고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2003년에서 2009까지 장·단거리를 가리지 않고 21차례에 걸쳐 미사일 발사실험을 한 바 있다. 2003~2008년 사이에 이루어진 미사일 발사실험은 대부분 단거리 미사일 이었다, 연합뉴스, 2009.10.12
이에 대해 일본은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중장거리 미사일에 의해 일본영토 전역이 사정권에 들어 크게 위협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의 큰 이유를 배경으로 일본은 ‘자위대’를 정규균으로 개편하고 군사력 증진을 꾀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중국의 급성장보다 우리에게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초점을 맞춰 일본의 군사력 강화 움직임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북·일관계
먼저 본격적으로 북한의 대량살상무기개발과 일본의 군사력 강화에 대해 알아보기에 앞서 북·일관계가 지금까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대략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해방 직후 북한에 진주하여 정권을 장악한 김일성은 자신의 항일운동을 내외에 과시하고 북한주민을 결속시키기 위해 ‘일본은 북한의 원수’라는 논리를 설파했다. 이러한 명분하에 북한은 1950년대 초반까지 일본과의 타협이나 관계정상화에 무관심하였다.
김일성 정권은 일본을 원수로 규정하였으면서도 제일동포를 끌어들이기 위하여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 적극적인 대일접근전략을 전개하였다. 1955년 2월 북한의 외무상 남일은 일본측에 보낸 성명을 통해 일본이 독립국임을 인정하며, 일본의 재무장을 반대하고, 북일 양국국민의 선린우호관계를 지지하며, 일본과의 무역 및 문화적 교류와 하토야마총리가 주장한 북일간의 상호교류를 환영한다고 하면서 관계정상화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1952년 비로소 미군정으로부터 독립되어 독자적으로 북한과 수교교섭을 개시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공산국가와 수교하는 것은 당시의 냉전상황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양국의 관계정상화 교섭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북한 또한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보다는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의 결성에 대하여 일본의 간섭이나 방해를 사전에 차단하려느 의도로 교섭을 추진 했던 것이다. 1955년 조총련이 결성된 후 1959년 북송문제를 타결하였으나 1965년 한일국교가 정상화 될 때까지 북일 양국의 수교교섭을 위한 노력은 매우 소극적이었다.
한인수교가 성사되고 몇 년이 지나자 북한도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다시 추진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러한 북한의 우호적 정책변화에 따라 1971년 11월 일본의회는 양국 우호촉진 의원연맹을 결성하였으나 일본은 이미 한국과 수교를 한 상태였으므로 한국의 양해없이 대북협상을 추진하기 곤란하여 북한과의 수교에는 미온적이었다. 그러던중 1990년 9월 4일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리는 등 한반도에 평화적 분위기가 조성되자 일본은 북한과의 수교교섭을 재개하였다.그리하여 1991년 1월 북한과 일본은 최초의 수교회의를 개최하였으나 1993년 3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에서 탈퇴를 선언하면서 북일 수교활동도 교착상태에 빠지게된다.
일본은 고이즈미 정권이 들어서면서 장기침체에서 경제를 회생시켜 보려 노력했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국내에서 저하된 인기를 만회하고, 북한의 미사일 및 핵 개발을 저지하는 한편 동북아시아에서 그들의 지위를 부상시켜 보려는 의도아래 북일 정상회담을 추진하였다. 이재형, ‘북일관계의 역사적 조명 및 관계정상화 전망’ , 고려대학교 평화연구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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