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회사]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방침과 조선의 충격과 상처(보수와 보수, 정통과 정통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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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방침과 조선의 충격과 상처
-보수와 보수, 정통과 정통의 충돌-
제 1장 들어가며
가톨릭에 대하여 어느 정도 온건한 정책을 펴던 정조의 승하 후, 가톨릭교도들은 정권을 잡은 북파의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었다. 1801년의 황사영 백서는 정부의 입장에서 가톨릭을 박해하는 정당성을 부여했다. 중국인 신부를 참수하였기에, 청과 야기될지도 모를 외교 문제로 고심하던 조선 정부에 황사영의 백서는 박해에 대한 정당한 근거가 되어준 것이다. 이후부터 천주교는 정통 유교의 사상적 가치관을 위협하는 것에서 외세를 등에 업고 국가의 안위를 해칠 수 있다는 방향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1831년 조선 교구가 창설되었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고난의 발걸음을 옮겨 조선에 입국하기 시작했다. 본 발제에서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설립과정을 개괄한 후, 선교방침, 선교사들의 배경과 지적수준, 영성 등을 살펴보고, 정통유교국가인 조선과 그 선교방침 및 특징이 조선 정부와 어떤 충돌을 일으켰을지 가늠해 보고자 한다.
제 2장 파리외방전교회
제 1절 파리외방전교회의 설립과정과 선교방침
1659년 포교성성(布敎聖省) 포교성성(布敎聖省): 17세기 중엽 선교사들이 그리스도교를 전파함에 있어서 宗敎外的 特權들을 사용하여, 말하자면 포르투갈 왕권을 등에 업고 有力者로 행세한다든지, 그 일부가 심지어 商行爲에 가담하는 등의 外道를 하고 있었다. 선교지역에서 폐단이 점점 더 크게 노출되면서 교황청 내에 선교 업무를 전담할 성성 설치의 필요성이 점점 높아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1622년 1월 6일 포교성성이 교황청 내에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이 성성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 대표적 요인은 다음의 두 가지 이다. 첫째는 여러 수도회들이 각기 다른 방법으로 선교 활동을 쓰고 있는 현실을 바로 잡아 일관성 있는 선교 정책을 펴나가자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보호권을 앞세워 선교 활동에 대해 지나친 간섭을 하면서 그것을 식민주의적 정책 실현의 도구로 삼고 있다는 폐단을 바로 잡기 위해서였다. 포교성성의 이런 정책을 실현해 나가기 위해 프랑스에 설립된 선교회가 바로 파리외방전교회였다: 이병호, “프랑스 선교사들의 영성과 한국 교회,” 「교회사연구」 5(1987, 10), 380~382.
의 포교지 발전 정책에 협조하기 위하여 창설된 파리외방전교회(Societe des Missions Etrange res de Paris; M. E. P.)는 수도자가 아닌 교구 사제들로 구성된 최초의 선교 단체이다. 이미 인도와 중국 등지에 진출하여 있어서 조선의 선교에 적합한 단체였다. 『서울 대교구 교구 총람』 (서울: 가톨릭출판사, 1984), 78~79; 김승호, “뮈텔(Mutel) 大主敎 在任時期의 敎會와 社會” (가톨릭 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8에서 재인용.
파리외방전교회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왕들이 로마 교황청(敎皇廳)과 ‘포교상의 보호권(保護權; padroado) 이라는 계약을 맺어 선교활동에서 상당한 우위권과 영향력을 행사하던 17세기의 상황에서 선교의 순수성을 회복하고자 시도하던 교황청의 노력에 의해 창립된 선교회였다. 따라서 파리외방전교회는 초기부터 정교유착(政敎癒着)을 금기(禁忌)로 하는 동시에, 교황청의 지시에 따라 적극적으로 순응하는 한편, 포르투갈 국왕의 보호를 받는 선교단체들과는 어느 정도의 긴장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노길명, 『가톨릭과 조선후기 사회변동』 (서울: 고대민족문화연구소, 1988), 136~137; 실제로, 당시 교황청에서는 파리외방전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이 선교회 소속으로 아시아지역에 파견되는 주교들에게는 교황파견 선교사임을 나타내는 교황감목(敎皇監牧)이라는 명예칭호를 부여했다고 한다.
초창기 파리외방전교회를 비롯한 선교회에 회칙 같은 것들이 따로 정해져 있지는 않았으나 포교성성이 전교회를 선교지로 보내면서 내린 훈령을 반포하여 선교지에서 지켜야할 사항들과 선교방침을 제시하고 있다. 훈령은 邦人 성직자 양성과 현지문화존중의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그 것이 잘 지켜졌는가는 본 발제에서 다루지 않는다). 훈령의 상세한 내용은 이병호, “프랑스 선교사들의 영성과 한국 교회,” 387~389를 참고.
해당 지역의 성직자 양성에 포교성성이 큰 중요성을 두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이며, 이것은 파리외방전교회 회칙에도 그대로 받아들여져서 전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이병호는 선교사가 주로 수도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져 교구 조직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구조적 기반 구축을 소홀히 했던 점을 감안할 때 이것은 대단히 큰 변화로 평가해야 할 점이라고 한다. 이병호, “프랑스 선교사들의 영성과 한국 교회,” 388.
파리외방전교회의 창립정신과 그에 따른 선교방침은 이 선교회의 초기회칙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파리외방전교회의 회칙은 1700년에 처음으로 채택되었는데, 이 회칙의 제 1장에서는 창립정신과 선교원칙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Jean Guennou, Les Missions etrangeres, Paris, 1963, 233~234; 이병호, “프랑스 선교사들의 영성과 한국 교회,” 392~393에서 재인용.
1) 동인도(東印度)에 프랑스 주교들과 성직자들을 파견하기로 하는 계획을 구상하도록 하신 하느님의 제일 첫째 목표이며, 그 계획을 실제로 수립한 교황청의 첫째 의도는 이교도인(異敎徒人)들의 회개에 있었다. 그런데 이를 실현하는 방법에 이르러서는, 이교도인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파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그 보다도 한층 더 중요한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이 그 정신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새로 入敎한 신자들이나 그 자녀들 가운데 합당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성직(聖職)에 올림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전 교회에 걸쳐서 해 주셨던 것 같이, 각 지방에 성직자단(聖職者團)을 구성하고 교계제도(敎階制度)를 설립시킨다는 원칙이었다. 그 길만이 단시일 내에 완전한 그리스도교를 형성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임을 관계자들은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언제까지나 사제(司祭)들을 계속 보내 줄 수는 없음이 명백한 사실이고, 또 그 사제들이 언어를 습득하는데 들이는 긴 시간을 생각하거나 편지에서 하나 둘씩 죽어가는 사실을 고려할 때, 본방인(本邦人) 성직자 양성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진다. 더욱이, 박해시(迫害時)에는 서양인 선교사들이 쉽게 발견되고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진다. 그에 비해 본국인 사제라면 쉽게 몸을 피하고 빨리 잠적할 수 있으며, 자기 동족들로부터 더 쉽게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면 그런 나라의 교회는 외국으로부터의 원조 없이 자립적으로 해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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