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시대의 매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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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로마시대의 매춘
Ⅰ 들어가는 말
Ⅱ 로마의 매춘부
Ⅲ 로마법과 매춘부
Ⅳ 로마인의 매춘관
Ⅴ맺음말
Ⅰ들어가는 말
리 테너힐에 따르면, 고대 로마는 “인류가 창조해낸 것 가운데 가장 우아하고 논리적인 구조”이다. 기원전 8세기 경 조그만 도시 국가에서 출발해 5세기 경에 거대한 제국이 된 로마는 여러 시대중에 역사적으로 가장 활발한 연구가 이뤄질 만큼 현대인은 이의 우수성과 신비로움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그토록 칭찬한 “우아하고 논리적인 구조”와 함께 무질서하고 다양한 성 관행이 널리 성행하였다. 그 중에서도 매춘부의 인구가 많을 때는 무려 250만 명에 이를 때도 있었다고 할 만큼 매춘은 로마 사회의 섹슈얼리티 성행위에 대한 인간의 성적 욕망과 성적 행위, 그리고 이와 관련된 사회제도와 규범. 즉 욕망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성 행동뿐만 아니라 인간이 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 사고, 감정, 가치관, 이해심, 환상, 성의 존재 의미 등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에서 대표적인 것이었다.
Ⅱ로마의 매춘부
로마 사회에서 매춘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배경에 대해 알아보겠다. 먼저 광대한 영토 정복과 도시 발전의 극대화로 로마인의 방종이 극에 달하면서 도덕적·성적 관행에 관련된 모든 개념과 규범을 경시하게 된 점이다. 또한 로마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전제적인 가부장적 법을 도입했던 것도 원인이 된다. 이는 가장이 국가의 개입 없이 가족 구성원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법으로 부여받았을 정도로 매우 강력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로마의 팽창주의 정책으로 성 노동자의 폭넓고 지속적인 공급을 보장되었던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로마 상층 계급은 어떤 도전도 받지 않고 소수 귀족이 전체 제국에 대한 커다란 권한과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은 무소불위의 유일한 권력으로 원하는 것을 실현했고, 성적 영역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배층의 시범으로 이때부터 성적 무절제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로마의 매춘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매춘부는 ‘자신의 몸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자’로 정의되었다. 공화정 후기에는 이에 ‘공개적으로 또는 공공연히’라는 문구를 더하여 매춘부의 행동양식을 보다 정확하게 밝혀 도덕적으로 비난하고자 하였다. 울피아누스 Ulpianus (170?~228) 로마의 위대한 법학자 중 한 명으로써 엘라가발루스 황제의 고문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223년에 살해당했다.
는 매춘굴 뿐 아니라 선술집이나 여인숙에서 일하는 모든 여성 또는 수치심에 구애받지 않는 그 밖의 모든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 매춘부라고 보았다. 이는 더욱 확대되어 후에는 성교의 금전적 댓가 여부, 공개적 또는 비공개적 여부를 떠나 결국 결혼의 테두리 바깥에서 ‘무차별적 성관계’를 가진 여성을 로마사회에서 매춘부로 보는 의견도 있었다. 그런데 당시 로마 여성이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매춘 이외엔 사실상 거의 없었으므로 첫 번째 정의로 보는 게 타당할 듯 싶다.
매춘부가 되었던 사람은 누구였는가? 버려진 신생아들은 망설임 없이 사람들에 의해 쉽게 주워 모아졌다. 그들은 금전적 이익을 위해 버려진 아이들을 매춘으로 이끌 준비가 되어 있었다. 또한 해적과 비적떼의 포로가 되었던 여자아이들은 나중에 경매시장에서 분류되어서 포주들에게 매입되었고 결국 도시의 매춘굴로 보내졌다. 또한 몰락한 농민들과, 사회적 지위가 낮은 신분으로 부모의 유산을 상속 받지 못하거나 제때 결혼하지 못한 여인이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매춘에 뛰어들었다. 강간당한 젊은 여성의 경우는 그녀에게 폭행의 책임이 있다고 판단되면 매춘이 강요되었다.
하지만 매춘이 항상 강압적인 선택만으로 이뤄졌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락쿠스 형제 시대에 활동했던 한 유명한 서사시인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전해진 호스티아(또는 킨키아)의 경우는 성생활에 대한 로마 정부의 규제를 피하고자 자발적으로 매춘부의 명부에 등록했다. 또한 클라디우스 황제 Tiberius Claudius Nero Germanicus 칼리쿨라 황제가 살해된 후 51세의 나이에 친위대에 의해 황제가 되었다. 검투사 경기에 도취되어 있었으며, 피에 굶주린 잔인한 성격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의 부인이었던 멧살리나도 스스로 밤거리와 윤락업소에 가서 직업 매춘부처럼 자신을 팔았다고 한다. 이처럼 로마의 여성들은 개인적으로 섹슈얼리티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명예가 손상되더라도 자발적으로 매춘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처럼 자유롭게 선택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힘은 대체로 그들의 특권적인 사회·경제적 지위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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