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중국)을 중심으로 본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

 1  아시아(중국)을 중심으로 본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1
 2  아시아(중국)을 중심으로 본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2
 3  아시아(중국)을 중심으로 본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3
 4  아시아(중국)을 중심으로 본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4
 5  아시아(중국)을 중심으로 본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5
 6  아시아(중국)을 중심으로 본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6
 7  아시아(중국)을 중심으로 본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7
 8  아시아(중국)을 중심으로 본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8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아시아(중국)을 중심으로 본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아시아(중국)을 중심으로 본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
1. 서론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는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흐름과 함께 전 세계로 확장되어 나아간다. 제국주의와 선교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서로가 서로의 확장을 위해 이용하고 이득을 취하는 관계였다. 각각의 동기가 어떠하였든지 간에 제국주의 국가들과 그곳의 교회, 그리고 선교지의 교회와 국가는 더욱 복잡한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이 글에서는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가 어떠한 양상을 띠며 확장되었는지를 살피고, 아시아 그 중에서도 중국에서 이러한 여러 요소들이 어떻게 서로 작용하는지를 남경교안과, 아편전쟁을 전후한 시기를 중심으로 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
우선 이글에서 사용되는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정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일반적으로 식민주의(colonialism), 제국(empire), 제국주의(imperialism)라는 개념은 매우 불분명한 상태로 혼용되고 있다.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박지향은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인 힘을 전략적으로 이용해서 상대방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 또는 그것을 의도하는 이념으로 정의한다. 박지향, 『제국주의; 신화와 현실』,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 22.
이 글에선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혼용해서 쓰겠다. 제국주의는 시대적으로는 좁게는 19세기 후반 경 빅토리아 시대 이후로 본다. 그러나 여기서는 제국주의 시기를 넓게 잡아서 16세기 유럽이 세계로 팽창하던 시기부터, 그러니까 서구가 해외 식민지들을 개척하기 시작한 시기들부터로 보고 이 시기의 가톨릭과 개신교의 선교를 살펴보고자 한다.
유럽의 처음 식민지 강대국들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그들이 기독교 황제로서 이방인들을 정복할 수 있는 신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식민지화와 기독교화는 동맹관계 뿐 아니라 동전의 양면이라고 가정했다. 로마 교황청은 신대륙 발견 이후 국제 해상로 개척과 식민지 확장을 놓고 서로 경쟁하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대해 각각 대등한 정치적 관계를 유지하고, 새로 개척되는 식민지역의 선교를 위해 양국과 정치 종교적 협상을 시도한다. 이것을 파드로아도(Padroado)라고 부른다. 포르투갈어로 Padroado Real, 스페인어로는 Patronato라고 표기하는 이베리아 국가들과 로마교황청 사이의 협정은 교황 알렉산더 6세에 의해 발표되었다.(1493년) 이 협정에 의하면 유럽을 기점으로 동쪽 지역의 식민 개척지(아프리카와 아시아;필리핀 제외)는 포르투갈에 그리고 서쪽지역(라틴 아메리카 전지역;브라질 제외)은 모두 스페인의 영토로 귀속되는 것을 로마 교황청이 인정함과 동시에 그 지역의 교회운영과 선교의 책임을 각 나라에 위임하였는데 이를 파드로아도 정책이라 부른다. 이것은 교회(교황)가 선교지에 정치적이면서도 경제적, 종교적인 영향을 행사하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상근,『동서문화의 교류와 예수회 선교역사』, 서울: 한들출판사, 2006. 151.
16세기 이후 가톨릭 선교는 서구의 해외 식민지 개척과 그 주민 정복의 두 요소를 전제하였다. 16-17세기 개신교도들 역시 이러한 교회와 국가 간의 밀접한 관계의 틀 속에서 사역했고, 선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정복된 지역 내의 모든 사람들은 서구의 통치자의 종교를 믿어야만 하는 것은 당연시되었다. 왕은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선교도 했다. Fritz Blanke Missionprobleme des Mittelalters und der Neuzeit, Zurich/ Stuttgart: Zwingli Verlag,1966. ;데이비드 J. 보쉬 지음/ 김병길, 장훈태 역,『변화하고 있는 선교』, 서울: 기독교문서 선교회, 2006.460에서 재인용.
이러한 당시의 주요한 주장에 대해 재세례파들, 경건주의자들과 제2의 종교개혁과 청교도주의의 일부지지자들은 예외였다. 즉 이들은 선교는 어떤 상황에서도 통치자의 의무로 간주될 수 없고 개인적인 결단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불신자들은 식민지와 정치적인 이해에 관계없이 신앙에로 인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데이비드 J. 보쉬, 위의 책, 421.
이러한 교회와 국가 간의 동맹은 17세기 중반이후 점점 공격을 받고 종교와 정치가 점점 제 길을 가게 된다. 이것은 영국에서 먼저 발생하였고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영국에서 1689년 의회와 윌리엄 3세 사이에 협정이 조인되었다. 권리장전이 채택되었는데 그것은 한편 군주제의 지속성을 보장했으나 동시에 왕권을 축소했다. 데이비드 J. 보쉬, 위의 책, 423.
18세기 중엽에는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덴마크 러시아 등의 유럽 식민 제국들이 있었다. 닐 퍼거슨,『제국』,서울: 민음사, 2006. 38.
이 시기에 제국주의가 확장된 데에는 우선 경제적인 동기가 가장 컸다. 특히 영국은 강한 해상력을 바탕으로 상업적 이윤을 추구하였다. 또한 제국주의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그 외 어떤 의미로 정당화되건 간에 항상 존재하던 것이 유럽인의 사명감과 의무감이었다. 제국주의는 단지 부를 생산하고 증가시키는 것보다 가난하고 무식하고 뒤쳐져 있는 주변부의 전통적인 야만적 가치를 교화시키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여기에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론에 기독교와 자유주의의 기능이 특히 중요하였다. 영국의 식민지 관리들은 주로 영국의 중간계급 출신들이었는데 중간계급은 18세기 말부터 복음주의적인 종교적 경건함과 엄격함에 깊이 영향 받고 있었다. 영국이 아시아, 아프리카를 문명화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성서적 의미로까지 확대되었다. 제국주의는 신이 주신 사명이 되었고 점점 규모가 커지는 제국은 사회적, 정신적 개혁을 기다리는 거대한 교구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당시의 개신교와 카톨릭의 선교적인 마인드는 의도하였던 의도하지 않았던 팽창하고 있는 제국의 도덕적인 목표와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박지향, 위의 책, 79.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