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와 한국적 통과 의례의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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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유교와 한국적 통과 의례의 고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유교와
한국적 통과의례의 고찰
들어가는 말
1.일반적 이해
푸는 말
1.생명의 기원
2.인간 이해
3.탄생
(1)산육례
(2)삼신할머니
(3)태교
(4)금줄
4.성장 과정
(1)관례
(2)계례
5.결혼과 여성관
(1)결혼
(2)여성관
6.고난이해
7.죽음과 내세적 관계
(1)상례
(2)제례
나가는 말
참고 문헌
들어가는 말
“요즘 아이들 문제야 어른도 몰라봐.” “황혼 이혼이 늘고 있어, 유교적 사회질서가 무너지는거야.” “동성동본 결혼 허용되는 것은 유교적 전통을 가진 이 사회에서는 말도 않됩니다.” “이번에 호주제 폐지되었다며?.” “아니 선생을 고발해, 이런 고얀놈들.”
심심치 않게 주위에서 들리는 말들이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지인이건 친척이건 현재 사회를 문제 삼는다.
현재 사회가 어떠한 기본 바탕위에 만들어졌으며, 또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 것이기에 이 시대의 사람들은 한국 사회가 변하고 있다고 토로하고 있다.
본 발제는 우리 현 사회의 기본 바탕을 점검하고, 한국 문화의 기본이 되는 종교와 신앙의 중심에 있는 유교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일반적 이해
공교(孔敎) ·공자교(孔子敎)라고도 한다. www.naver.com - 두산백과사전
인(仁)을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이념으로 삼고,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정치학이며, 수천 년 동안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양사상 지배하여 왔다.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난 공자(B.C 551~B.C479)는 고국인 노(魯)나라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년간 여러 나라로 돌아다니며 ‘선왕(先王)의 도(道)’를 역설하였으나 끝내 그 이상을 펴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학(私學)을 열어 많은 제자를 가르치는 한편 《시(詩)》 《서(書)》의 2경을 정리하고 예(禮) ·악(樂)을 선정하였으며 《춘추(春秋)》를 저술하고 또한 《역(易)》을 좋아하여 그 해석서라 할 수 있는 《십익(十翼)》을 저술하였다.
공자는 인을 가장 중시하였으며, 인은 곧 효(孝)이며 제(悌)라 하여 인의 근본을 가족적 결합의 윤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육친(肉親) 사이에 진심에서 우러나는 애정을 강조하는 한편, 그것을 인간 사회의 질서 있는 조화적 결합의 원리로 삼고, 정치에도 전개시켰다. 그것은 춘추시대 말기의 인간주의적 풍조의 영향을 받아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도덕성에 주목하고, 거기서부터 현실사회의 혼란을 구제하려 하였다. 공자는 훌륭한 정치를 행했던 주(周)의 예악(禮樂)을 끌어들여 그 실행을 강조하면서, 예는 전통적 ·관습적인 사회규범이며 그것은 곧 인의 사회성 ·객관성을 보증하는 것이라 하였다.
공자가 죽자 추종자들에 의해 8개 학파로 나뉘었으며, 그들은 각각 공자의 가르침을 가장 정통으로 계승했다고 자처했다. 공자의 사상과 가르침은 〈논어〉에 잘 나타나 있으며, 맹자(BC 371경~289경)는 공자의 가르침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전국시대(BC 475~221) 초기에 묵자(墨子:BC 476경~390경)의 집산주의(集産主義)와 양주(楊朱:BC 440~360경)의 개인주의로 물들어 있던 사상계를 비난했다. 봉건왕조 주(周)의 해체와 패권정치의 부상으로 힘과 부(富)의 목소리가 커졌다. 초기 도가(道家)와 법가(法家) 지식인들은 현실 정치에 실질적으로 참여했으며, 유가(儒家)의 지식인들도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유가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최고 덕목인 덕치(德治)가 실현될 수 없는 현실 정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현실을 도외시할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당시 유가가 처한 상황이었다.
맹자는 유가사상의 정통계승자로 알려져 있다.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의 제자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맹자는 사회비판자, 도덕철학가, 정치적 활동가로서 위대한 삶을 살았다. 맹자는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사대부(士大夫) 계층을 중용하는 것이 국가발전의 관건이라고 주장했다. 농업을 최우선시하고 임금도 노동을 해야 한다고 한 농가(農家)의 주장에 대해 맹자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구분으로 답했다. 맹자에게 유교 사대부는 관리(官吏)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와 왕이 인정(仁政)을 베풀도록 가르치는 책임을 지닌 학자를 의미했다. 맹자는 봉건군주에게 단순한 정치적 조언자가 아니라 왕의 스승으로서 임하고자 했다. 유가의 도덕적 이상주의와 당시의 구체적인 사회적·정치적 현실을 결합시키기 위해, 맹자는 당시 유행하던 사상조류인 묵자의 집산주의와 양주의 개인주의를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다. 묵자의 집산주의는 보편적인 사랑인 겸애(兼愛)를 강조하여 모든 사람을 자기 가족과 같이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맹자는 그것을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같이 무관심하게 자기 아버지를 대하게 됨을 의미한다고 했다. 양주는 묵자와는 반대로 자기를 우선시했는데, 맹자는 양주의 주장이 정치적 무질서를 초래하게 한다고 반박했다. 두 사상가에 대해 맹자는 "묵자는 겸애를 주장하니 이것은 아비가 없는 것이요, 양주는 자기만을 위하니 이것은 임금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맹자는 사회개혁의 방도를 밝혔다. 그것은 왕들이 추구하는 이(利)·부(富)·권(權) 등을 정의·공공정신·복지·영향력 등으로 대치하는 것이었다. 맹자는 다스림의 첩경은 민의(民意)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왕보다 나라가 중하고 나라보다 백성이 더 중하며 왕도(王道)를 행하지 않는 군주는 군주일 수 없다고 한, 강한 민본주의 사상에 따른 것이었다. 이 사상에는 맹자가 선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스스로 완전해진다는 성선설(性善說)의 철학적 신념이 있다. 맹자는 한 인간의 형성에서 생물학적·환경적 요인이 갖는 구속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늘이 부여해준 고귀한 근본인 대체(大體)를 넓히고 순화시킬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마음의 힘을 완전히 깨달으면 자기의 본성을 알게 되고,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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