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토진종과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의식

 1  일본 정토진종과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의식-1
 2  일본 정토진종과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의식-2
 3  일본 정토진종과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의식-3
 4  일본 정토진종과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의식-4
 5  일본 정토진종과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의식-5
 6  일본 정토진종과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의식-6
 7  일본 정토진종과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의식-7
 8  일본 정토진종과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의식-8
 9  일본 정토진종과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의식-9
 10  일본 정토진종과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의식-10
 11  일본 정토진종과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의식-11
 12  일본 정토진종과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의식-12
 13  일본 정토진종과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의식-13
 14  일본 정토진종과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의식-14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일본 정토진종과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의식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일본 정토진종과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의식
목차
Ⅰ. 머리말
Ⅱ. 일본 정토종의 역사
1) 호넨(法然, 1133~1212)의 사상
2) 신란(親鸞, 1173~1262)의 사상
Ⅲ.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의식에 나타난 정토진종
Ⅳ. 맺음말을 대신하여
Ⅰ. 머리말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국의 근대를 얘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다른 일본인들과 달리 조선 예술을 애정의 눈으로 바라보고 조선민족미술관 건립에 힘썼으며, 특히 조선의 미를 ‘비애의 미’로 표현한 것이 유명하다.
이러한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조선의 반응은 긍정적인 입장이 많았다고 할 수 있는데 해방 이후를 거쳐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에 대한 연구는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야나기의 조선예술관이 한국 미술계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으며 미술계에 국한할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분야에 끼친 영향이 크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의 야나기 무네요시 연구가 주로 조선에 관한 활동 및 조선의 예술관 등 조선과 관련한 주제에 집중된다고 한다면, 일본에서의 연구는 야나기의 다른 활동에도 주목하고 있다. 야나기는 조선 도자기에 대한 관심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민예운동을 일으킨 것으로도 유명한데 민예라는 단어를 처음 만들기도 했다. 그의 민예론은 구체적으로 다도와 공예에 대한 철학으로 이어지는데 그의 미의식에 중요한 기반이 된 것은 불교사상에 입각한 종교적 차원의 미의식이었다.
본고에서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일본 불교 종파의 하나인 정토진종의 역사와 중심 사상을 살펴보고 이 내용이 야나기 무네요시의 불교 미학 사상에 끼친 영향에 대해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말년에 자신의 미의식을 완성하는데 있어 일본 불교, 특히 진토진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필자는 불교에 관한 지식이 전무하기 때문에 불교 이론에 대한 자세한 검토에까지는 이르지 못할 것이지만, 야나기 무네요시가 인생의 말년에 자신의 불교 미학을 정리하여 발표한 글들을 통해, 야나기가 미와 종교를 어떻게 접목시켜서 사고했는지, 그리고 그러한 미의식은 진토진종과 어떠한 밀접성을 가졌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Ⅱ. 일본 정토진종의 역사
1) 호넨(法然, 1133~1212)의 사상
정토진종을 개창한 호넨(法然, 1133~1212)의 전기를 영역한 류가쿠 이시즈카에 의하면 일본 불교는 중국과 인도의 불교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호넨이 출현하기까지는 이들 세 나라의 불교는 모두 근본적으로 같았다. 호넨 이전의 모든 불교 설법가들은 인도나 중국이나 일본을 막론하고 현세에서의 성불이라는 최고 목표를 위해 주로 부처님의 계율을 준수할 의무와 진리에 대한 관행을 강조했다. 이에 반하여 정토 불교는, 범부들은 각 종파에서 가르치는 불법의 모든 엄격한 요구들을 이해하고 준수하기에는 지적 능력이나 의지가 너무나 약하기 때문에 그러나 모든 노력을 부질없는 짓으로 포기하고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이라는 강력한 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단순한 신심(信心)으로 그의 거룩한 명호(名號)를 부르면 아무리 하잘 것 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다만 그의 은총으로 부처님이 계신 곳에 태어날 수 있다고 했다. 길희성, 『일본의 정토사상』, 민음사, 1999, 23쪽.
호넨은 일본 불교 정토종의 개조(開祖)로 법명은 겐쿠(源空)이고 속명은 세이시마루(勢至丸)이다. 어릴 때 부친을 여의고 미마사카의 보다이사(菩提寺)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15세 때 헤이안 불교를 대표하는 천태종의 본산 히에이산(比叡山)에 들어가 겐코(源光)의 제자가 되었고, 『부상약기(扶桑略記)』의 저자로 알려진 고엔(皇圓)에게서 천태학을 배웠다. 18세 때 지겐보 에이쿠(慈眼房叡空)에게 밀교를 배우고 천태원계를 받아 염불성인이 되었으며, 이 때 호넨보 겐쿠(法然房源空)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후 교토(京都)·나라(奈良) 등지로 다니면서 도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다가, 43세 때 『관무량수경』을 주석한 선도(善導)의 『관무량수경소(觀無量壽經疏)』을 읽고는 아미타불의 본원(本源)을 깨닫고 염불문에 들었다. 그 뒤 히가시야마산(東山) 요시미즈(吉水)에 암자를 짓고 정토의 교법을 설파하면서 염불삼매(三昧)를 얻고, 일본 정토종의 교리를 정한 최초의 책 『선택본원염불집(選擇本願念佛集)』을 저술하였다. 호넨은 말법 시대에 극락왕생하는 최상의 길을 정토문에 드는 것으로 보고, 의지가 약한 말법 시대의 대중들은 계율·관행·예불 등의 전통적인 수행법을 버리고 아미타불의 명호만 외워도 극락왕생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염불 한 가지만을 정토왕생의 업으로 삼는 전수염불(專修念佛)이 가장 확실한 수행법이라고 하였다. 두산백과사전 인용.
염불을 하는 행위는 전통 불교의 수행 방법에도 속해있었다. 하지만, 호넨 이전 시기의 염불은 대체로 문자 그대로 불(佛)을 염하는 행위, 즉 생각하고 명상하는 행위로서, 어디까지나 계율을 엄히 준수하고 마음을 정화하는 행위와 더불어 하나의 수행 형태였다. 이렇게 염불을 수행의 한 형태로 보는 것이 호넨이 주창한 칭명염불(稱名念佛), 곧 부처님의 명호를 소리내어 부르는 염불운동에 의해 거부된 것이다. 호넨은 계율(戒律), 관행(觀行), 예불(禮佛), 그 밖에 공덕이 된다는 잡다한 선행들을 정토왕생에 필요없는 것으로 보고 모두 거부했을 뿐 아니라, 서방 극락 정토나 아미타불의 모습을 관(觀)하는 관행(觀行)으로서의 염불조차 범부들은 행하기 어려운 난도(難道)로서 거부했다. 그는 오직 신심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만이 말세 중생이 쉽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이도(易道)라고 보았다. 헤이안조 불교에 이미 오랜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던 수행의 한 형태로서의 염불을 과감히 부정하는 이러한 행위는 대중불교로서의 정토신앙의 극치였으며, 결국 일본불교에 하나의 혁명적 변화를 초래했다. 길희성, 위의책, 26~27쪽.
호넨은 경전을 읽는 행위나 계율을 지키는 행위 등을 배제하고 염불만을 선택한 대신 염불에 온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를 전수염불(專修念佛)이라 한다. 이렇듯 하나를 선택해 집중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호넨 이후에 전개된 가마쿠라 시대 신불교 운동의 일반적인 특징이자 정신이 되었다. 호넨은 인간의 구원 문제에 대하여 종래의 전통적인 불교와는 전혀 다른 쉽고 대중적인 접근 방법(易道)를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쉬운’ 길은 깊은 신앙을 요구했고 전수(專修)라는 전적인 헌신을 요구했다. 길희성, 위의책, 29~30쪽.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