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적 관점에게 본 이승만 정권과 기독교 - 한국교회사의 제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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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비판적 관점에게 본 이승만 정권과 기독교
한국교회사의 제문제
1. 들어가는 글
일제 해방 후 건립된 대한민국 초기 정부는 제1공화국의 이승만 정권이다. 해방 후 혼란스런 한반도 정세에서 이승만의 강력하고 단호한 정치적 선택은 비록 반쪽이지만 공식적인 대한민국정부가 수립하는데 공헌한다. 특별히 이승만 정권은 기독교 성장에 있어서 큰 공헌을 하였다. 한국 기독교는 해방 후 미군정을 거치면서 한국 기독교사에 유례가 없었던 성장세와 권력의 힘을 키워나갔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기독교와의 교류와 연대를 통해 각각의 체제를 유지하고 확장시키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의 여러 입장들은 정치권에 직·간접적으로 반영되었다. 이승만 정권 당시 내각의 거의 절반 정도가 기독교인이었으며, 1948년 5월 제헌의회 때는 이윤영 목사의 기도로 개회를 알렸고, 8월 15일 정부수립 선포식 때는 “하나님과 동포 앞에” 대통령 직무 수행을 선언하는 문서를 낭독하기도 했다. 기독교인이 전 국민의 5%에 못 미치던 1945년 미군정 당시 이미 크리스마스가 국가적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1951년에는 군종제도도 생겼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과 그 당시 기독교는 한편으로 많은 문제들을 동시에 남겼다. 이승만 정권은 독재적 권위주의 성격을 극복하지 못했다. 또한 장기집권의 야욕으로 3.15부정선거를 행했고 4.19혁명을 맞아 이승만 정권은 불명예스럽게 막을 내렸다. 기독교는 이승만 정권과 유착되어 교세 성장과 기득권 권력 형성에만 전념해서 기독교 본연의 예언자적 사명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친일청산, 남북분단, 부정부패, 정교유착 등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 문제들을 다음 세대에게 위임한다. 본 글에서는 이승만 정권과 기독교가 극복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다시 상정하여 살펴보려한다. 그 중에서 친일청산 문제와 부정부패, 정교유착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처음으로 이승만 정권 건립과 기독교 성장에 토대를 마련하고 그 방향을 제시하였던 미군정시기를 기독교와 연관 지어 살펴볼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이승만 정권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2. 미군정 통치와 한국 기독교
미군정(1945-1948)은 남한에 단정이 수립되기 전 남한의 절대적 통치 주체였다. 미군정의 통치 정책은 해방 후 민족적 염원인 자주통일국가 건설과 향후 남한의 단정 수립, 더 나아가 초기 이승만 정권의 대한민국 정부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차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미군정은 초기에 정치노선에 있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지만 점차적으로 좌익 정치세력을 적대하고 친미성향이 강한 우익 세력 중심으로 통치를 이끌어간다. 결국 친미성향을 보이는 단체들이 사회 전반적인 주도권을 잡게 된다. 그 이유에 대해 박정신은 제2차 세계대전 종식과 함께 동서 냉전체제가 전 세계를 강타하였고 동서 냉전의 구조는 해방정국 이후 한반도에 큰 영향을 미쳐 남쪽의 경우(북쪽도 동일하게) 미국과 친화적인 세력이 득세할 수 밖에 없었다고 분석한다. 박정신,『한국 기독교사 인식』(서울:혜안, 2004), 194. 또한 남한에서는 이승만을 비롯한 기독교계 인사들이 득세하고 친기독교적 분위기로 변화면서 기독교 안에서도 좌경세력은 약화되고 우익세력이 상대적으로 강해지게 되었다. 앞의 책, 211.
종교적으로 본다면 미군정 통치는 친기독교적이었다. 미군정 초기, 미군정 관리들에게 한국 상황에 대한 정보를 주었던 자들은 미국 유학 출신자이며 기독교 교인들이 다수였다. 미군정에 한국상황인식에 결정적 영향을 준 접촉자들은 여운홍·조병옥·윤보선·장덕수·김도연·임영신·박인덕·이효목 등의 친한민당계 개신교 교인들이었다. 강인철,『한국기독교회와 국가·시민사회』(서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168.
기독교의 친미적 성향 강인철은 개신교의 친미적 성향은 선교사들의 영향도 크다고 주장한다. 특히 선교사와 군정 관계를 본다면 더 농후해진다. 선교사들은 한국개신교의 국가와의 교류와 통합에 가교역할을 했고 국가권력에 대한 교회의 접근력을 확장시켜주었다. 결국 선교사들의 역할이 한국개신교를 친미지향적으로 전환케 했다. 앞의 책, 169. 또한 미군정은 영어를 사용했고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한국 내 집단이 미국 유학 출신들이 많았던 개신교였음을 감안할 때 상호간의 유대형성이 가능했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책, 168-169참조.
과 미군정 관료 대다수가 기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에서 미군정과 한국기독교간의 우호적 교류가 보장되고 촉진되었다. 미군정 시기에 친기독교적 정책은 다음과 같다. 형무소 목사의 임명, 크리스마스 국가 공휴일로 지정, 중앙방송을 통한 기독교 복음전파 허용, 주일선거의 반대, 일요일의 공휴일화, 일요일에 행해지는 국가행사에 대한 반대 등이다. 강돈구, 『미군정의 종교정책』,「종교학 연구」12권(1993), 31-35. 일례로 1948년 5월 9일 일요일 실시될 예정이었던 총선이 기독교계의 요청으로 당초 5월 10일 월요일로 변경되었다.
또한 1946년 미군정의 최고위직에 임명된 한국인 50명 가운데 35명이 기독교 신자였다. 강인철,『한국기독교회와 국가·시민사회』, 176.
이렇듯 미군정수립 후 기독교는 남한사회에서 우대세력이 되었고,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사회 진출에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 서정민,『한국교회의 역사』(파주: 살림, 2003),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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