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연구주요저작강독 -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제5장, 종장) - 국가사회주의, 일원적 지도 체제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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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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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 5장 ~ 종장 -

1. 강독한 저작의 주요 내용 및 논지 요약
(1) ‘국가사회주의’와 당의 ‘일원적 지도’체제 확립(1958~1961)
(2) 종장
2. 본인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 및 그 이유
3. 강독내용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이해되지 않는 내용, 의문점
4. 전반적인 내용에 대한 본인의 평가
5. 새로운 문제 제기
1. 강독한 저작의 주요 내용 및 논지 요약
(1) ‘국가사회주의’와 당의 ‘일원적 지도’체제 확립(1958~1961)
김일성은 1957년 11월 4~21일 10월혁명 40주년 경축행사 및 각국 공산당대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당내 위기를 극복한 김일성은 자신감을 갖고 소련과 중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이 회의에서 채택된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의 수정주의와 교조주의에 대한 반대의 메시지는 반김일성운동이 국제적인 수정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단정짓는 근거가 되었고 자신의 정책의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소련 방문 후 김일성은 국내 소련계를 처분하는데 성공했고 마오쩌뚱과의 담판을 통해 중국군 철수 합의를 끌어냄과 동시에 연안계 처우에 대한 권한을 얻게 되었다. 인민군 내에서도 연안계와 소련계를 추방함으로 명실공히 항일빨치산의 군대를 만들어 내는 작업을 이뤄나갔다. 연안계와 소련계의 추방은 곧 경제발전노선을 둘러싼 대립을 총리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제1차당대표자회를 통해 갑산계, 빨치산파, 김일성의 동생 등이 당내 핵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당직 개편이 단행되고 김두봉, 박의완이 숙청된 후 당내 주요요직은 물론 군내의 주요세력으로 등장하였고 야전지휘관 중 김창덕 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또한 국내계인 오기섭이 공격받고 박창옥이 비판받아 숙청되면서 당내 세력관계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전 사회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완료되고 당내 숙청도 마무리됨으로써 통치기구의 전면적 개편이 시작되었다. 당행정부의 신설로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 재판소, 검찰소, 내무성, 군대 내 간부사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 우의의 원칙을 내세우며 군인민위원회를 군당의 지도 아래 두었고 도,시,군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국가기관, 경제, 문화기관 군대 등 모든 기관, 단체들은 해당 당위원회의 통제 하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것은 당 중심, 그리고 인물 중심의 거대한 위계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과 정부의 숙청은 광범위한 범위에 미치면서 북 내부의 세력관계나 권력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로 이어졌다. 연안계는 거의 전원이 숙청됐고, 소련계는 대부분 이중국적을 유지했기에 일부는 숙청 또는 행방불명되고 상당수는 소련으로 귀환하였다. 1957년 체결한 ‘이중국적자의 공민권조절에 관한협약’으로 이중국적의 소련계 한인은 1년 이내 한쪽 국적을 선택하게 되었다. 국내계의 숙청은 연안 ,소련계를 능가했고 과거 공산주의운동에 참가한 자로서 갑산계 이외에 살아남은 사람은 박정애, 리주연과 중간파 출신으로 백남운, 홍명희, 정로식 정도였다.
1961년 9월 11~18일에는 제4차 당대회가 개최되었다. 로동신문 사설은 『영광스러운 승리자들의 대회』로 규정하였고 김일성은 9월 11일 6시간 이상에 걸친 장문의 보고를 통해 생산관계의 사회주의 개조와 북반부 민주기지 공고화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하며 조선혁명의 승리를 위한 가장 중요한 담부라는 위치를 부여하였다. 대회 마지막 날인 9월 18일에는 당규약이 일부 수정되어 채택되었다. 전문에 “조선로동당은 공산주의자들이 항일무장투쟁에서 이룩한 영예로운 혁명전통의 직접적인 계승자”라고 규정하였고 여러 민족해방 투쟁의 전통에서 김일성 빨치산투쟁과 직접적 관련 없는 투쟁 전통은 배제되고 빨치산 투쟁으로 일원화되었다. 당 이념변화는 당내 세력관계에서 노골적으로 나타났는데 국내계, 소련계, 연안계 인사들이 사라져버린 자리에는 주로 만주파가 메우게 되었다. 그리고 내각 출범에 있어서 로동당 이외의 정당출신자는 한사람도 없었고 이는 결국 당과 내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까지 일체화된 것을 의미하였다. 제4차 당 대회의 승리자는 바로 만주파였던 것이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당내 연안계와 소련계 숙청의 폭충우 속에서 1957년 8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가 출범하여 새롭게 내각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당내 연안계와 소련계의 중심인물들에 대한 숙청작업이 마무리단계에 접어들면서 1958년 초부터 당내 숙청바람은 군내에도 불기 시작하였다. 김일성은 인민군 창건 10주년 기념일인 1958년 2월 8일 인민군 제324부대를 방문하여 인민군의 기본 성격을 규정하는 연설을 하였다. 우선 ①인민군이 항일무장투쟁의 계승자라는 주장을 구체화했고 ②당의 혁명적 무장력으로서 조선로동당에 의하여 조직된 군대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신민당 출신에 대하여 반당종파분자라고 단정 짓고, 그 중심인물들인 군 내의 연안계에 공격을 화살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최종학의 비난을 통해 소련식 군내 정치사업 방식, 종래의 군사단일제(유일관리제)를 비판하였다. 이러한 군내 숙청은 1958년 말에는 고위간부에게, 1959년부터는 전 부대로 확대되었다. 요주의 인물에 대한 ‘사상검토’와 각급 부대에 대한 ‘집중검열’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 소련계 군인은 소련으로 돌아감으로서 연안계에 비해 비율이 매우 낮았다.
1958년 3월 8일 당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인민군 내 당위원회 제도를 전면 실시한다고 밝혔다. 인민군 전체에 ‘인민군당위원회’를 마련하고 군단, 사단, 연대에도 각 당위원회 설치하였다. 종래 군사단일제 원칙에서는 각급 당위원회에 부대장과 정치부장이 포함되지 않았으나 새로운 제도에서는 모든 간부가 당위에 소속돼 당의 통제를 받도록 하였다. 당위원회의 책임자는 정치부장도 될 수 있고 부대장도 될 수 있도록 하였다. 3월 중 당조직위원회 확대회의가 열려 소련식 군사단일제와 중국식 정치위원제가 북조선의 실정에는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원제’를 실시하였다. 즉 최고사령관-민족보위상-총참모장-각급 지휘관의 명령계통과 당 중앙위-인민군당위-총정치국의 당 명령계통을 병치하는 원칙이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이원제는 명령계통의 혼란과 군내 규율을 어지럽혔는데 숙청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1960년 9월 8일 ‘조선로동당 인민군위원회’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김일성은 인민군을 다른 대중조직과 같은 당의 지도하의 조직하여 당의 혁명적 무장대오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군내 최고조직은 당위원회이고 군단, 사단의 최고조직도 각 당위원회임을 강조하였다. 김일성이 북조선 독자의 제도로 내세운 당위원회에 의한 군통제제도는 사실상 1956년부터 중국에서 실시돼온 군중당위제도에 기초를 둔 “당위원회의 집단적 지도하의 분담책임제”를 참고로 한 것이다. 이는 상호 대립적 관계였던 군사단일제와 정치위원제를 ‘당위원회’라는 집단적 지도체계 속에 융합시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1962년 12월 당중앙위 제4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군사부문 최고의사결정기구로 ‘당군사위원회’를 설치하였다. 당군사위원회는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의 도, 시, 군까지 조직되었는데 이 회의에서 소위 4대군사 노선이 제시되어 경제건설과 군사력강화의 병진정책 채택되게 되었다.
군내 정치사업에 있어 세가지 전환이 추진되었다. [①교조주의 비판, 즉 소련의 비판 ②군내 정치사상교육, 즉 공산주의 교양, 계급 교양의 강화 ③항일부장투쟁의 전통을 ‘혁명전통’으로 승격시켜 ‘소련식’을 대체하는 공산주의 교양의 정신적 내용으로 삼는 것.] 이렇게 세가지이다. 이것은 항일무장투쟁의 전통을 혁명전통으로 승격시켜 소련식을 대체하는 공산주의 고양의 정신적 내용으로 치환된 것을 의미한다. 항일무장투쟁은 군의 범위를 넘어서 로동당의 혁명전통의 중심에 놓이고 당의 무장력인 인민군도 항일무장투쟁의 계승자가 된 것을 의미한다. 인민군 ‘창군의 이념’의 일부로 시작된 항일무장투쟁의 전통은 ‘유일한’ 노동당의 창당 이념이 되었고 나아가 건국이념으로 정식화되기에 이른다. 1961년 9월 제4차 당 대회 개정 당규약은 “조선로동당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항일무장투장에서 만들어 낸 영예로운 혁명전통의 직접적 계승자”로 규정하였다.
1956년 4월 제3차 당대회 당시 세력분포에서는 만주파가 당내에 상당히 진출하고 있었지만 숙청 직전까지 군내 연안계와 소련계의 비중도 만만치 않았다. 1958년 3월부터 59년 말까지 2년 가까운 시간에 소련계와 연안계를 숙청하는 작업으로 만주파는 군 장악에 성공하였고 1961년 9월 제4차 당대회는 김일성이 명명한대로 ‘승리자의 대회’였고 그것은 만주파의 대회였다. 이러한 추세와 병행하여 당군의 일체화 작업이 나타나는데 먼저 군 주둔지역 내 지방당조직과 군당조직의 결합 그리고 로농적위대 창설에 따른 민병조직의 개편으로 군대의 사회에 대한 영향이 증대되었다. 그리고 1960년경부터 김일성은 군부대가 주둔지역에 대한 정치사업을 전개하도록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군대가 주둔지역에 대하여 끊임없이 영향을 주어야 하며 군대가 주민들의 락후한 영향을 받을 것이 아니라 군대가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야 한다.”
김일성은 1956년 12월 전우너회의 이후 거둔 경제적 성과에 근거하여 자심감을 갖고 대회에 임할 수 있었다. 1957년도 경제적 성과로써 중공업우선 노선에 이의를 제기한 세력의 오류는 확증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58년 6월 11일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3차 회의에서 김일성은 국가투자 없이 각 지방마다 자체의 힘으로 지방원천을 동원하여 소형공장을 세우도록 하여 각 군에 1개 이상 지방산업 공장을 건설토록 하였고 종래의 증산경쟁운동 대신 ‘집단적 혁신운동’이 제창되면서 5개년 경제계획을 2년 이상 앞당겨 완수할 것이라고 결의하였다. 1959년 3월부터 천리마운동이 발기되고 이후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사회주의건설의 총노선’이라는 위치를 부여받게 되었다. 그러나 계획이 너무 높게 설정되어 실행에 이상이 생겼고 1959년도 계획의 수정을 거쳐야만 하였다. 연말 김일성은 성장목표를 낮춘 사실을 밝히고 계획목표는 공업에서 30~40%, 농업에서 5~6% 성장이 현실적이었다고 술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