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 사회주의체제 성립사(서동만) 5장,종장 - 일원적 통치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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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1945~1961 5장, 종장(서동만)
서동만의 저작 의 5장은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당의 일원적 지도체계가 전 사회에 퍼진 시기를 분석했다. 이 시기 북조선에서는 정부기구, 군대, 공장, 농촌 등 전 부문에 걸쳐 중앙으로부터 지방 말단에 이르기까지 일원적 통치체제가 관철됐다.
1. 주요 내용 및 논지 요약
김일성은 1957년 11월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이때 방문을 통해 김일성은 소련 측으로부터 국내 소련계를 처분할 권한을 확보했다. 또 같은 시기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있던 마오쩌뚱과의 담판으로 8월 전원회의 결정에 대한 중국 측의 개입을 둘러싸고 북중 양국간 타결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저자는 보고 있다.
1958년 초부터 김일성은 인민군 총정치국에 대한 중앙당 집중지도에 착수해 인민군을 명실공히 항일빨치산의 군대로 만들어내는 작업에 나섰다. 연안계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반혁명적 무장폭동사건이 꾸며지고 장평산, 김웅, 최인 등 연안계 군인이 체표되기도 했다.
지방당 차원의 반혁명적 무장폭동사건, 반종파투쟁에도 박차가 가해졌다. 1958년 3월 3~6일 열린 제1차 당대표자회에서는 최창익, 박창옥 등에 대해 "일부 지역에서 당과 정부를 반대하는 시위와 폭동을 비밀리에 조직"했다고 발표해 8월 종파사건에 반혁명, 반국가행위도 결합시켰다. 또 박금철은 "지방주의와 가족구의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김일성을 중시으로 한 항일무장투쟁 외에 과거의 민족해방투쟁 경험이 정치적 역관계에 반영되는 것을 더이상 허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중앙의 숙청사업을 일단락 짓고 지방 차원의 숙청이라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인사 조직상의변화도 이어졌다. 1958년 1월 당간부부가 폐찌되고 당중앙 및 지방 각급당위원회에서 각 행정부문의 간부를 관리하는 구너한이 주어졌다. 9월 26~27일 당중앙위 전원회의에서는 산업부를 중공업부와 경공업부로 분리해 당의 경제부서가 두 부서를 포함해 건설운수부 농업부 상업재정협동단체부의 진용을 갖추고 5개년 계획의 조기완수에 임하게됐다.
1959년 8월 28일 당중앙위 상무위원회는 당 정치사업을 모든 사업에 선행시킬데 대한 결정을 채택해 특히 경제부문을 담당하는 행정관리 기관에서 사업수행에 대해 해당기관의 "행정 기술적 지도만으로는 부족하고" "정치사업의 선행에 기초를 둔 당조직의 당적 지도 및 통제를 결합시키는데서야말로 보장된다"고 밝혔다. 1이같은 당 우위의 제도화는 이듬해 1월 15일 당중앙위 상무위 결정 국가기관 및 경제 문화기관에 대한 당의 령도와 통제를 강화할 데 대하여로 구체화되고 우선 군대내에 도입을 거쳐 지방경제지도체계의 개편과 함께 농촌에서는 청산리방식으로, 공장에서는 대안의 사업체계로 2년 정도 걸려 실현되어 간다.
한편 당과 정부 내 숙청은 광범위로 미치면서 북조선 내부 세력관계나 권력 구조의 근본적 변화로 이어졌다. 1961년 4월 제4회 당대회는 김일성에게 승리자의 대회였다. 그는 단순한 권력자가 아니라 당, 정부, 군, 경제, 이데올로기 등 북조선 체제 전체를 직접 구상, 실현하는 설계자가 됐다. 당대회에서 채택된 당규약은 전문에서 "조선노동당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항일무장투쟁에서 이룩한 영예로운 혁명전통의 직접적 계승자이다"라고 규정했다. 김일성의 빨치산투쟁으로 민족해방 투쟁이 일원화된 것이다. 동시에 이 대회는 만주파의 대회이기도 했다. 만주파는 당내 최대 다수로서 유일한 정파가 됐다. 중앙위원과 후보위원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고, 연안계와 소련계는 소수만 남아 정파로서의 의미를 잃었다.
군내 연안계 및 소련계를 숙청하면서 만주파는 당.군을 장악하는 한편 당.군 일체화가 가속됐다. 김일성은 인민군 창건 10주년 기념일인 1958년 2월 8일 인민군 제324부대를 찾아 "인민군은 당의 혁명적 무장력으로 조선로동당에 의해 조직된 군다"라고 선언했다. 인민군이 "통일전선의 군대"라는 입장은 "반당종파분자"들이 확산시킨 "잘못된 이론"이라고 공격했다. 이후 군내 숙청은 반당 폭동음모와의 관련이라는 혐의로 진행됐고 연안계와 소련계가 숙청된 빈자리는 만주파 군인들이 차지했다. 이를 통해 김일성은 군을 완전히 독자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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