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 신학] 현대신학의 패러다임 -D 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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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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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현대신학의 패러다임 -D. 죌레
제 1 장 조직 신학이란 무엇인가?
조직신학 이란? 하느님에 대한 사고에로의 초대이며, 신학의 대상은 오로지 신과 인간의 관계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인간의 경험을 성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칼 라너(Karl Rahner)는 "계시의 말씀에 귀기울여 경청하는 그리스도인의 의식적인 노력"이라고 한 바 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의 요소를 표현하면서, "말씀의 계시"로부터 시작하고 "신앙하는 자"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성서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하느님과의 경험들-그 경험들-히브리 사상과 그리스 사상의 차이-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경험, 다양한 경험들을 기술적인 용어와 논리를 가진 체계 안에 파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특수한 경험들을 전달하고 성찰하여야 하겠다는 요구가 그리스 사상과 히브리 사상을 종합하게 하는 기초가 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서구신학의 기본이 된 것이다. 지식의 대상을 정복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학문적 행위와, 다른 한편 경청하고 응답하는, 즉 칼빈(Calvin)과 루터(Luther) 로 대표되는 사상으로 히브리 성경에 접근하는 입장 사이의 긴장인데, 이 책에서도 히브리 사상을 강조하면서 계속 이 긴장관계를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의 지식, 하나는 이론을 사용하는 인식적 지식(cognitiveknowledge)이고 다른 하나는 "안다"는 말이 가지는 의미의 인식에서 오는 것으로서, 가령 창세기 4장 "And Adam knew his wife Eve and she became pregnant." 이러한 지식은 인식하는 자와의 일치를 통하여 알게 되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위에서 말한 나의 초대, 즉 하느님을 사고하는 시도에로의 초대를 수정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시도에로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신앙의 체험은 내면적으로 신앙인들 사이에서 계속적인 비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모든 경험이 신적인 경험으로 등장하지 않게 해야 한다. 하나의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신앙은 신학 위에 있지만, 신앙 역시 비판적 성찰과 자기 이해가 요청되는 바 그것은 "누구나 다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이 있다."고 하는 주관주위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신앙의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합의점을 항상 제시하여야 한다. 개신교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합의점은 공동체를 통하여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신학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신앙인들과 신앙인들이 의사소통을 하는 외부체계와의 관계 때문이다. 하느님에 관한 경험을 증거 해야 마틴 니묄러(Martin Niemoller)나 오스카 로메로(Oscar Romero)와 같이 민중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하느님을 증언하는 경우가 있고, 성찰 적이고 응답 적인 신학적 저작 속에 나타나는 수도 있다. 조직신학이 하는 기능은 이들 세 가지 요소들을 지정하고 또 동시에 이들을 서로 연관시키는 일이라 할 것이다. 이들 요소라고 하는 것은:
성서와 전통, 혹은 텍스트:
성서의 역사적 상황과 그 해석 자들 혹은 콘텍스트:
신앙인들의 신앙공동체, 혹은 하느님의 민중.
텍스트와 콘텍스트 그리고 하느님의 민중은 어떤 조직신학에 있어서도 기본적인 개념들이라 하겠다. 콘텍스트와 텍스트의 대화는 신앙의 주체로서의 하느님의 민중과 연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텍스트"가 말하는 하느님에 대한 경험의 실천을 이해하지 못하면, 즉 만일 우리가 그 경험의 실천을 우리 콘텍스트 안에서는 우리 자신의 경험과 연결시키지 못한다면, 하느님을 실제로서 고백할 필요가 없다. 신학은 신앙의 행위인 것이다. 신학이 신앙과 어떻게 다른가? "신앙은 지식을 찾는다"(fides quaerens intellectum). 신앙은 그 원인의 확실성에 대하여 질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의 정의는 다음 세 가지를 내포하고 있다. 전제(신앙:fides), 성찰적 행위(찾는다:quaerens), 결과(지식:intellectum)이다. 신학의 전제는 신학이 신앙에 의하여 실행된다는 것이다. 신앙은 찾는다(fides quaerens)이라는 도식은 또한 신앙은 찬양한다.(fides cantans) 신앙은 노래와 춤으로 그리고 침묵으로 혹은 투쟁적 신앙으로도 표현된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형식의 하나가 바로 지적 명확성과 포괄성의 추구인 것이다.
스콜라주의의 공식은 모색하고 질문하는 신앙을 말하고 있다. quaerens(모색하는)이라는 말은 신앙이 그 자체의 어두운 그늘 즉 회의 없이 전재할 수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회의 없는 신앙은 강한 것이라기보다 이념적(허위의식)이라 하겠다. 하느님의 실재에 참여한다고 하는 실천적인 자기 이해를 추구하고 있는 신앙은 가치 있는 인간 생활을 위한 조건에 대한 합리적 추구를 담당하는 노고를 마다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 역시 자기이해를 모색하는 도정에 있다. 참 신앙은 본질적으로 항상 설득하려 하고 그 신앙을 말하고 이웃과 함께 서로 나누려고 한다. 신앙은 확실히 나의 개인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앙이 항상 나의 사적인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통하여 존재한다. 기독교 신앙은 교회의 신앙이다. 교회는 신앙의 지속성을 대표하고 있으며 기억과 약속을 통해서 존속하는 것이다. 신앙은 프락시스의 한 형태이다. 나의 활동적인 생애, 나의 소원들, 나의 희망사항들, 나의 고민들-이것들은 모두 나의 프락시스이다. 신앙이 자기 이해를 위해서 신학을 필요로 하듯이 우리 삶의 프락시스 역시 계속해서 방해가 필요하고 내면화가 필요하고 이론과 지적인 확실성과 명확성과 자기비판이 필요한데, 까닭은 이들을 통해서 보다 의식적인 프락시스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프락시스로부터 이론적 성찰에 이르는 순환적 운동이 있고(1), 다시 변화된 프락시스로 돌아간다(2). 신앙은 그 자체를 이해하고 의사소통하기 위하여 신학을 필요로 하지만 이 신학 이론은 보다 깊은 신앙으로 이끄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신학은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보다 깊은 신앙에로 성숙시키기 위하여 있다. 신학의 사고 모델은 프락시스로 출발하여 프락시스로 끝난다. 이것이 삶을 거친 신앙이다.
제 2 장 정통, 자유, 급진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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