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선교사 채핀부부와 언더우드의 관계에 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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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미국 선교사 채핀부부와 언더우드의 관계에 관한 소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미국 선교사 채핀부부와 언더우드의 관계에 관한 소고
여는 글
흔히 채핀하면 협성여자신학교의 교장을 역임하고 한국 최초의 여성신학교의 문을 열었던 선구적인 여성신학 교육가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녀의 한국에서의 오랜 선교활동에 비해 그의 남편 빅터 채핀에 대해서는 학계의 관심이 미비했던 것이 사실이다.
사실 채핀(채부인)은 처음부터 한국에 선교사로서 온 것이 아니라, 한국에 선교사로 가는 남편 빅터 채핀(채피득)의 아내로 함께 내한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한한지 3년만에 남편이 사망하자, 남편의 비전과 뜻을 이어받아 채핀 부인도 평생을 홀로 한국의 여성신학교육과 선교를 위해 바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채핀부인(채부인)의 선교적 삶과 정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남편 빅터 채핀(채피득)의 삶을 엿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본 소고는 채핀(채피득)의 한국에서의 공식적인 선교활동 3년에 있어 언더우드와의 관계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확인하고, 채핀과 언더우드와의 만남과 관계, 더 나아가 채핀과 연희전문학교와의 관계에 대해 주목하며 연희전문학교 설립과정에 있어서의 채핀의 공헌과 의미에 대해 조명해 보고자 한다. 아울러 언더우드의 여성인식과 여성신학교육에 대한 관심이 채핀 부인의 여성신학교육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조명해 보고자 한다. 본 발제문은 배윤숙의『채핀부인의 생애와 여성신학 연구』(2006년도 감신대 신학대학원 역사신학전공 석사학위논문)의 일부내용을 정리하여 새롭게 구성하여 소개하는 글이다. 필자는 배윤숙의 논문작성에 협력하면서 빅터 채핀과 언더우드와의 관계에 대해 리서치하고 자료를 함께 보면서 이 부분의 내용을 함께 작성한바 있어 본 발제를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채핀 부인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위 논문을 참고하기 바람.
1. 채핀 부인의 생애
채핀부인은 1883년 9월 26일 미국 아이오와주(Iowa state) 매닝(Manning)에서 출생하여 1901년 아이오와주 라도라 고등학교(Ladora high school)를 졸업하고 4년간 교편을 잡았다. 1906년에는 아이오와주립대학(Iowa State University)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고 1907년 워싱턴의 존플레쳐대학(John Fletcher College) 피아노과를 입학하여 1911년 졸업한다. 그해 6월 7일 빅터 채핀(Chaffin, Victor D. 蔡彼得)과 결혼하여 1912년 딸 모텔 딸 모텔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고 단지 1956년 감리회보에 실린 글에는 “채핀이 귀국하시어 계실 곳은 그의 따님댁으로서 여러분께서는 문안편지를 늘 드리기 바라면서 다음에 그의 주소를 소개한다. 524. W. Haison. S. T. Monticello, Indiana. U.S.A” 라고 씌어있다. 『감리회보』 4권 5호 (1956) 5.
을 낳았다. 마침내 1913년 4월 19일 남편과 딸, 동생 베어(B. R. Bair, 裵義禮)와 함께 미감리회 선교사로 파송 받아 한국에 내한했다. 그 당시 그는 단지 미감리회 선교사로 파송 받은 남편의 아내로 내한하였고 동행한 동생 베어는 여선교사 자격으로 정식으로 파송 받았다.
채핀(A. B. Chaffin)은 1913년 미감리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North) 선교사인 남편과 여동생, 딸과 함께 내한했지만 3년 뒤 남편과 사별하고 1916년 미감리회 해외여선교회(The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 청원하여 여선교사가 되어 전도부인(Bible Woman)을 교육하는 부인성경학원(Womans Bible Training School)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1918년 부인성경학원의 원장인 앨벗슨(Miss. M. M. Albertson)이 죽자 채핀이 원장을 이어받아 1921년 남북 감리교 여선교회의 연합운영으로 바뀐 ‘감리교협성여자신학교’(The Union Womans Bible Training School)의 초대교장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스크랜튼 대부인(Mrs. M. F. Scranton)과 앨벗슨을 비롯한 이전의 여선교사들이 다져놓은 발판위에서 최초로 체계적인 여성신학교육을 시작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3.1운동 이후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협성여자신학교의 가야할 길을 모색하였고 그것은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교육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채핀은 이곳을 통해 보다 실용적인 여성신학교육 커리큘럼을 만들었고, 실력 있는 교수들을 임용했으며, ‘학생회’와 ‘Home Bakery’ 같은 학생 자치활동들을 적극 지원하여 학생들의 여성지도력을 육성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한국여성들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확인하면서 한국여성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그는 1931년 14명의 감리교 여선교사와 함께 한국기독교 최초로 여성 목사안수를 받고 그 해부터 협성여자신학교와 협성신학교가 통합된 한국 최초의 남녀공학 학교인, 감리교신학교(The Methodist Theological Seminary) 부교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특히 감리교신학교에 농촌과를 개설하여 그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일꾼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그리고 1937년에는 열악한 만주에 가서 ‘만주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역자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해방 이후에도 여러 가지 여선교회 사업을 도왔는데 특히, 은퇴한 독신 여성목회자들을 위한 안식관을 지어 여성목회자를 향한 끊임없는 관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해방이후 감리교해외구제위원회(Methodist Committee for Overseas Relief)의 대표로서 전쟁으로 상처 입은 한국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2. 빅터 채핀과 언더우드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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