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사무엘상 17장 41-47 - 1그램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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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설교] 사무엘상 17장 41-47 - 1그램의 믿음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그램의 믿음
제목: 1그램의 믿음
본문: 사무엘상 17:41-47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예수를 잘 믿는 고등학생이 입학했습니다. 신입생이죠. 이 신입생이 수업을 듣기 위해 수강신청을 하고 첫 수업에 들어갔습니다. 그 수업은 ‘철학’과 관계되는 수업이었는데요. 많은 선배들이 ‘철 수업은 듣지마’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학생은 사정상 ‘철학’수업을 들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첫 수업에 들어갔습니다.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칠판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GOD is dead’ 이 말이 무슨 말이냐하면 ‘하나님은 죽었다’라는 말이에요. 그러면서 종이를 나눠줍니다. 교수가 말합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이 죽었다고 칠판에 적었고 그렇게 생각한다. 여러분 중에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이 종이에 ’하나님은 죽었다‘라고 써서 내라 그러면 그 사람은 적어도 성적을 ’B’는 주겠다. 그러나 만약에 나의 말에 동의가 안되는 사람은 안내도 된다. 단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된다. 당연히 내가 내주는 숙제와는 별도로 해야 된다. 아니면 이 수강정정기간에 다른 과목으로 바꾸어도 된다.] 알고보니 철학을 담당하는 교수는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였습니다. 이 교수의 말을 듣고 몇몇 학생은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대부분의 학생은 종이에 ‘하나님은 죽었다’라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고민 고민하다가 교실에서 나가지도, 종이를 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자 교수가 그 학생을 지목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자네는 종이도 내지 않고 교실에서도 나가지 않지? 자네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믿는가?’ 그러자 학생이 대답합니다. ‘교수님 저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라고 믿습니다’ 그러자 교수가 말합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이제부터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증명해야 되네’ 그리고 거기에 교수와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학생 외에 다른 학생들이 심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죽었다고 주장하는 철학교수와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라고 주장하는 신입생과의 처절한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죽었다고 주장하는 철학교수와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라고 주장하는 신입생과의 치열한 싸움과 같은 싸움이 등장합니다. 바로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입니다.
골리앗은 블레셋 장군으로 키가 큽니다. 덩치도 큽니다. 온갖 무기를 가지고 있고 이 무기를 잘 사용합니다. 어릴 때부터 전쟁에 참가했습니다. 그만큼 전쟁에 관한 경험이 많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다윗은 어릴 때부터 양을 치던 목동이였습니다. 덩치도 작고 힘도 약합니다. 무기라고 해봐야 고작 작대기 하나, 물맷돌 그리고 돌멩이 5개밖에 없습니다. 이런 싸움을 하는데 상식적으로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당연히 골리앗이 이기는게 상식입니다. 당시 블레셋 군사들은 당연히 골리앗이 이길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이 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대결하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많은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이런 싸움을 싸우고 살아갑니다. 지금 이곳에 앉아 계시는 여러분이 다윗과 골리앗과의 싸움 같은 상식적으로 대결자체가 무의미한 싸움을 싸우고 계시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가정에서 아무도 교회를 안다니고 예수를 안 믿는데 홀로 교회에 나오고 예수를 믿는 가정에서 나오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가정에서 치열한 싸움을 늘 싸우고 계십니다.
예전에 저희 가정이 그랬습니다. 저희가정은 아버지가 교회를 잘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 형 그리고 저 이렇게 세명은 교회를 다녔습니다. 평소에는 아버지가 교회를 가는 것을 막지 않으십니다. 그러던 어느날부터 어머니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은혜를 많이 받으시고 어느 순간부터 전도를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때 저희 집은 월성동에 있었고 교회는 조야교회를 다녔는데요 어머니께서 매일 월성동에서 조야동까지 와서 전도를 하셨습니다. 때로는 버스 안에서 전도를 하셨습니다. 제가 신학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께서 만취가 되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을 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집의 가장이다. 그런데 나는 가장의 취급을 받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예수가 이 집의 가장이고 하나님이 이집의 가장으로 생각되는 것 같다. 나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 그러니 선택해라 나를 이집의 가장으로 인정하면 여기에 있고 하나님을 이집의 가장으로 생각하면 이집에서 나가라’ 어머니와 형과 저는 영적으로 큰 싸움을 싸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가정에서 이와 같은 싸움을 싸우고 계시는 분이 많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만 그럴까요? 직장을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직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상사의 마음에 맞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마음에 없는 소리도 하고 평소에 먹지 못하는 술도 마셔야 됩니다. 집에 아내가 아파서 누워있는데 상사의 눈치 때문에 6시 칼퇴근이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교회 다닙니다. 그래서 술 마실 수 없습니다’ ‘나는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야 됩니다.’ 라는 소리를 할 수 있을까요? 얼마전 어떤 신문사에서 이상한 실험을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6시 칼퇴근하는 것이였습니다’ 몇몇 분들이 6시가 되자 ‘저 퇴근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회사동료들이 ‘오늘 무슨 일있어?’라고 묻습니다. 부장님이 ‘오늘 무슨 일있어?’라고 묻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퇴근 시간이 되어서 퇴근하겠다고 말하는데 ‘무슨 일있어?’ 라고 묻는 회사 분위기에서 ‘나는 교회에 다니니깐 술 마실 수 없습니다’ ‘저는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야 되기 때문에 회사에 일하러 나올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회사에서 이런 치열한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은 죽었다고 말하는 철학교수에게 하나님은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신입생과 같습니다. 이 철학교수는 이 학생에게 낙제의 점수를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게다가 평생 하나님은 없다는 것을 연구해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박사학위를 받았고 학생을 가르칩니다. 이런 사람에게 이제 막 대학에 들어온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신입생이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라고 주장합니다. 상식적으로 누가 이길까요? 뻔한 싸움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같이 뻔한 싸움입니다. 가족 중에 누구도 예수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예배를 나오고 기도하러 나오는 것, 그 상황에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뻔한 싸움입니다. 평일 퇴근 시간에 맞추어 퇴근하는 것이 어려운 분위기의 회사에서 ‘나는 교회 다닙니다. 그래서 술 마시지 못합니다. 주일에 일하러 못나갑니다.’ 라고 말하면서 신앙생활을 해나간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그런데 지금 수많은 성도들이 가정에서 회사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결과가 불 보듯 뻔한 싸움을 힘겹게 싸우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가져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이 부분에 대한 해답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섰습니다. 골리앗은 다윗을 보고 어이가 없어서 웃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니가 나를 개로 알고 개 잡는 막대기를 가지고 왔느냐?’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서 오라 내가 너의 머리를 잘라서 저 새들에게 먹이로 줄 것이며 너의 몸을 쪼개어서 들의 짐승에게 양식으로 줄 것이다’
이때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지금 다윗은 자신보다 훨씬 큰 골리앗을 앞에 두고 전혀 겁먹지 않습니다. 골리앗이 자기를 찢어 죽이겠다고 말해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골리앗 당신을 내 손에 넘겨주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엇인가요?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신과 같은 성스러운 존재를 신뢰하고 복종함’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 신과 같은 성스러운 존재를 신뢰하고 복종함’은 언제 나타납니까? 우리가 평안할 때 나타납니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그때 나타납니까? 아닙니다. 믿음은 가장 어려울 때 나타납니다. 내 앞에 큰 산이 있을 때 나타납니다. 다윗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평소에 양을 치는 목동이였습니다. 이목동 다윗의 믿음이 언제 나타났습니까? 평안할 때 였습니까? 아닙니다. 골리앗이라는 큰 어려움이 있을 때 다윗의 믿음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죽었다고 주장하는 철학 수업의 교수에게 아무도 하나님은 살아있다고 감히 나서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학점에 문제가 생길까봐 그리고 갓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가 감히 교수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라고 주장한 것 이것이 믿음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지금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필요합니다. 아무도 예수를 믿지 않는 가정에서 ‘나는 예수를 믿는다’라고 말 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평소 정시 퇴근이 어려운 분위기의 회사에서 ‘나는 교회에 다니니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나는 일요일에 일하러 나갈 수 없습니다’고 말 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용기는 대단한 믿음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믿음이면 됩니다. 예전에 배웠던 찬양이 생각이 나는 데요 가사가 이렇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다면 이산을 들어 저리로 옮기고 백부장만한 믿음만 있다면 부하의 병을 고쳐주겠네’ 예수님께서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이야기 하시면서 큰 믿음을 이야기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겨자씨만한 아주 작은 믿음이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부하의 병을 고쳐준 것은 백부장의 작은 믿음이였습니다. 이렇게 작은 믿음을 저는 ‘1그램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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