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도로부터의 그리스도교 - 영계 길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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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선도로부터의 그리스도교
: 영계 길선주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약 1년 전에 친구가 임종시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 말하기를 ‘길 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니 내 집 살림을 좀 돌보아 주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잘 돌보아 드릴 터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재산을 관리하며 미화 100달러 상당을 훔쳤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는 그 돈을 미망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1907년 1월 15일 새벽 평양장대현교회 집회에서의 길선주의 죄 고백.
위 고백은 우리나라 초기 대 부흥운동에서의 핵심 인물인 길선주의 죄 고백이다. 길선주 목사는 행동적인 죄의 회개로 시작했지만, 이 회개는 전국적 대 부흥운동으로 또한 한국적 기독교의 뿌리를 만들며 내면적 죄의 고백으로까지 발달하도록 신앙적 토대를 만들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본 발제에서는 먼저 길선주가 살았던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종교적 상황, 그 중에서도 도교(선도)에 대해 알아보고, 이러한 역사적 흐름 가운데 있었던 길선주의 역할에 대해 부흥운동과 함께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9세기 말의 도교
19세기 말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은 유불선 3교와 샤머니즘을 상황에 따라 선별적으로 실천한 다종교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당시 ‘도교인’이란 배타적으로 도교만 신봉한 자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도교적 종교 의례를 많이 실천한 자를 뜻한다. 여기서 도교란 철학적 도교가 아닌 민간신앙으로서의 도교 혹은 종교적 도교, 곧 내단수련(內丹修鍊)을 중시하고 불로장생의 이상향인 신선세계를 지향한 선도(仙道)로 불린 느슨한 소규모 조직을 가진 민중종교를 말한다. 이강오,《도교와 한국사상》, 서울: 범양, 1988; 김태곤, 《한국사상사대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조선 중기까지 지식인들은 공직에 나가거나 권력과 재산이 있을 때는 유교적 입장을 취했지만 야인으로 물러날 때나 세속적으로 실패했을 때에는 도교에서 위안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선시대에 가장 중요한 도교적 흐름은 양생법(養生法)을 강조한 수련 도교였다. 조선 후기에 명산 선경을 찾아 수련하는 탈주자학적 도인들이 증가했다. 한국도교사상연구회 편, 《도교사상의 한국적 전개》, 아시아문화사, 1989.
조선시대의 도교는 민간신앙과 의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도교가 민간신앙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한 성수신앙(星宿信仰)으로, 민간에서 가신(家神)의 하나로 숭배되는 칠성신은 바로 이 도교적 성수신앙의 직접적인 산물이었다. 칠성신을 의인화한 칠성신도(七星神圖)를 모신 사당이 많이 세워졌다. 허준의 《동의보감》도 도교적인 양생법을 수용했다. 《옥구경》은 치병을 위한 주문과 관련해 일반인은 물론 불교인들도 널리 읽었다. 한편 선행을 권장하는 선서(善書)가 조선 초기부터 대한제국 시기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대부분의 선서는 유교화되어 유교적 윤리 덕목을 강조하는 한편, 선행에 대한 보응이 물질적 복으로 이해되어 기복신앙으로 발전되었다. 옥성득, “평양대부흥운동과 길선주 영성의 도교적 영향”, , 2006(25).
19세기 지방 차별을 받았던 북한 지역에서는 유교에 대한 대안으로서 반체제적 특성을 가진 선도를 실천 수행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는 선경을 찾아 입산하여 은거하며 수련하는 자들도 있었고, 도시에 거주하면서 생업을 꾸리다가 일시적으로 수련하기 위해 입산하는 자들도 있었다. 후자 가운데 청일전쟁 전후에 신종교로서 미국 종교인 개신교를 받아들인 자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평양의 장로교인들이 되었고, 이들에 의해 개신교도 다른 신종교들이 가진 다종교 융합의 한 형태로서 도교[선도]와의 습합이 일어났다.
도교에서 그리스도교로 ; 청일전쟁
평양의 도교인들-송인서, 김종섭, 길선주, 김성택, 옥경숙, 정익노, 이재풍, 김찬성 등-은 1890년대 한국 사회의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갑오 동학혁명으로 야기된 청일전쟁은 동아시아의 정치 지형뿐만 아니라 종교 지형도 바꾸었다. 1894년 한국은 무정부 상태였고, 9월의 평양 전투는 도시를 황폐화시켰다. 대부분의 주민은 피난길에 올랐다. 중국 군인들이 두달 간 도시를 점령하면서 가옥을 약탈하고 쌀과 솥을 빼앗아 갔으며, 부녀자들까지 겁탈했다. 일본군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에는 80,000명의 주민 가운데 남은 자는 수백 명에 불과했다. 전쟁과 더불어 상륙한 일본 콜레라는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고, 일본 상인들의 값싼 상품으로 전통 경제는 와해되었다. 주민들은 실존적 불안 속에서 의지할 곳을 찾았으나 전통 종교는 더 이상 위로가 되지 못했다. 중국에 대한 일본의 승리는 한국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서양 문명과 종교를 한층 더 높이 평가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또한 귀신 숭배의 사기를 저하시켰고, 중국 신들의 숭배를 죽였으며, 남아 있던 불교의 일부 버팀목들도 잘라버렸다. 서양 문명을 수용한 일본의 승리는 한국인들이 가진 전통 종교에 대한 최면을 각성시켰고, 서양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해제시켰다. 화이관적 전통적 세계관이 해체되는 ‘일종의 정신적 혁명’이 이 시기에 진행되었다. 위 같은 논문
도교에서 개종한 평양의 개신교 지도자들은 1907년 평양 부흥운동의 주역이 되었고, 길선주는 그 대표적 지도자였다. 1903년부터 1906년까지 감리교회가 주도한 부흥운동에서는 선교사가 주역이었지만, 1907년 장대현 장로교회 부흥회를 계기로 길선주를 비롯한 한국인 목회자와 부흥사가 그 주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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