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국가] 한국선교와 정교분리 역사-사건을 중심으로(초기 정치의식, 대부흥운동, 105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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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국선교와 정교분리 역사-사건을 중심으로
1. 서 론
한국 땅에 기독교가 전래되어 들어온 초기부터 정치적 역학관계로 인하여 기독교는 민족문제에 대하여 깊이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선교사들도 1884년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의 입국부터 한반도 내의 정치적, 민족적인 문제에 깊이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한반도를 지배하는데 있어서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집단으로 기독교를 주목했으며, 선교사들은 자신의 선교활동을 위하여 ‘정치적 중립’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급변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때로는 자의로, 때로는 타의로 한반도 내의 많은 문제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국선교 초기 선교사들은 정치적 상황 및 선교적 상황에 따라 정교분리 내지 비정치화를 주장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정치에 개입하기도 했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본 글에서는 먼저 초기 선교사들의 정치의식을 살펴본 후, 구체적인 사건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 초기 선교사들의 정치의식
한국선교 초기 다수의 한국주재 선교사들이나 일제 침략 세력의 정책 당국자들은 한국교회가 ‘민족문제’ 혹은 ‘정치적 국권회복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경향을 비판하며, 그 신학적 근거로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웠다. 서정민, 『한국교회의 역사』, 살림, 2003, p.21
한국교회의 항일과 무력행사에 대하여 게일은 ‘광란’이라는 표현을 쓰면서까지 비판하였고,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4, p.233
감리교 선교사 해리스는 1906년 6월에 감리교의 엡웟 청년회가 “교회의 목적을 왜곡하고 정치 목적으로 이용”된다 해서 청년회를 해체시키기도 하였다.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p.234
또한 구세군 한국 개척선교사 호가드(R. Hoggard)는 1908년 10월 통감부를 찾아가 스스로 정치의 불간섭을 선서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광주 구세군이 정치에 개입하자 아예 구세군 영문을 폐쇄하기도 하였다.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p.235
이러한 선교사들의 비정치화 시도는 민족 문제에 관여하는 것보다는 교회를 보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기본입장에서 나온 것이었다.
교회의 보호를 위한 비정치화와 달리 일선의 지방 선교사들 중에는 한국의 자주 독립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직접 독립 의식 고취와 기타 활동에 관여한 자들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한국의 독립과 신앙을 관련시켜 ‘하나님을 의지하여 독립을 이루자’는 내용의 전도지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1909년 10월 3일 서대문의 구세군 선교사 윌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연설을 전도지에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