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으로서의 인간의 삶 삶으로서의 비극

 1  비극으로서의 인간의 삶 삶으로서의 비극-1
 2  비극으로서의 인간의 삶 삶으로서의 비극-2
 3  비극으로서의 인간의 삶 삶으로서의 비극-3
 4  비극으로서의 인간의 삶 삶으로서의 비극-4
 5  비극으로서의 인간의 삶 삶으로서의 비극-5
 6  비극으로서의 인간의 삶 삶으로서의 비극-6
 7  비극으로서의 인간의 삶 삶으로서의 비극-7
 8  비극으로서의 인간의 삶 삶으로서의 비극-8
 9  비극으로서의 인간의 삶 삶으로서의 비극-9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비극으로서의 인간의 삶 삶으로서의 비극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비극으로서의 인간의 삶, 삶으로서의 비극
시작하는 말: 그리스 비극의 이해
비극이라는 물음표
비극이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슬픔의 자기반성이다. 슬픔이 아무리 넓고 깊다 하더라도 정신이 없었더라면 슬픔은 자기를 비출 수 없었을 것이다. 정신은 슬픔의 거울이다. 그리고 오직 이 거울을 통해서만 슬픔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크기가 드러난다. 그러나 비극이 모방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이 비극은 크기를 가진 고귀하고 완전한 행동의 모방으로서, 쾌적한 장식을 가진 언어를 사용하되 각종의 장식은 작품의 상이한 여러 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된다. 비극은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연민과 공포를 통하여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완수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제6장
고귀하고 완전하며 위대한 행위이다. 다시 말해 비극의 제 1차적 모방의 대상은 정신의 위대함이지 슬픔이 아니다. 비극 또한 하나의 예술로서 마지막에는 심미적 쾌감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라면, 고통의 재현 그 자체는 결코 비극의 첫째가는 존재이유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고통을 그 자체로서 재현하는 것이 비극의 존재이유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이 오직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통해 완성된다고 말하는 까닭은 비극이 그려 보이려 하는 정신의 크기가 오직 정신의 고통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슬픔을 묘사하고 재현하는 것 자체가 문학의 당연한 사명이라거나 슬픔을 노래하는 예술은 무조건 좋은 예술이라 주장한다면 이는 잘못된 말일 것이다. 모든 슬픔이 고통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대개의 경우 우리의 슬픔이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그림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운명과 그리스 세계
그리스 비극의 본질적인 탐구대상은 바로 운명(moira)이다. 운명이란 모든 사람이 타고나는 각자의 몫이다. 그것은 각 사람의 삶의 본질적 형상이라 할 수도 있다. 운명은 자기만의 삶의 몫이면서도 우리 자신이 그 까닭을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기원전 5세기는 고대 그리스 사회를 통틀어 가장 합리적인 시대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순한 경험과 학문적 인식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경험은 하나의 사실을 단순히 아는 것이지만 인식은 같은 사실이라도 그것이 왜 그래야만 하는지 그 근거를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이런 합리적 인식태도야말로 비극이 생겨나고 꽃을 피웠던 시대를 특징짓는 시대정신이었다. 그리고 이런 인식태도는 다른 무엇보다 전승된 신화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났다. 왜냐면 신화적 세계이해는 자연과 역사 그리고 사름의 마음의 일을 설명할 때 그것들의 자연적 원인을 탐구하려 하지 않고 많은 일의 원인을 신의 행위로 돌렸기 때문이다. 그 원인을 확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신화적 세계이해는 세계에 대한 합리적 인식이라기보다는 시적인 상상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모든 일에 합리적인 원인과 근거를 묻고 그것을 알아야만 어떤 사태의 진상을 인식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시대에 운명은 심각한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운명이란 인식할 수 없는 삶의 이면이요, 까닭을 알 수 없는 어두운 힘, 맹목적인 사슬이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이몬은 성격”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운명이 신적인 힘 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피안의 사슬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고유한 성격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사람들을 비합리적인 운명적 필연성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시키려 했던 것이다.
우리의 삶은 매우 불합리하고 낯선 것이다. 장애를 안고 태어나 고생이란 고생은 모두 겪고 생활고로 인해 자살을 하는 사람도 있고, 수천의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고도 여전히 호의호식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이 왜 그런 인생을 살게 되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해답은 사회학적 분석으로도, 과학으로도 불가능하다. 그것은 아낭케(ananke), 즉 자연적인 필연성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으나 디케(dike), 즉 도덕적 정당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 자연학이 하나의 작용과 다른 작용의 필연적 연관성을 설명한다면 윤리학에서 말하는 필연성은 쾌락과 고통의 필연적 연관성이다. 쉽게 말해 착한 사람이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이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윤리적 필연성이 자연적 필연성과는 달리 현실 속에서 언제나 관철되는 필연성이 아니라는 데 있다. 윤리학은 디케, 정위와 당위적 필연성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윤리학은 현실과 필연성 사이의 괴리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해 줄 수 없다.
그리스 비극의 시작
널리 알려져 있는 그리스 비극들은 대부분 기원전 5세기에 꽃피었던 문학형식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는 비극적인 시대이기는커녕 그리스의 황금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시대였다. 페르시아 전쟁과 함께 시작되어 전후 더욱 번성한 아테네의 비극시인들은 그렇게 자유롭고 풍요로운 시대에 눈앞에 보이지 않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비극성을 보았고 또 그것을 동료시민들에게 그려 보여주었다. 행복한 순간에 불행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면에서 그리스 비극시인들의 상상력의 힘은 대단하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불행을 떠올려야 하는 것인가? 오직 죽음 앞에서만 삶의 절대적인 가치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 존재의 어찌 할 수 없는 한계를 상기할 때 비로소 삶이 참된 진지함을 획득하기 때문이며, 인간이 그 한계에 부딪힐 때 당할 수밖에 없는 고통을 통해서만 보이지 않는 정신의 크기를 그려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노예적인 정신은 정신이 이룩한 업적 속에서만 정신의 흔적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시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로운 정신은 도리어 인간이 영웅적으로 패배하는 지점에서 정신의 크기와 위대함을 발견한다. 물론 슬픔과 고통이 사람을 언제나 지혜롭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사람들을 더욱 이기적이 되도록 하고 자기중심적이 되도록 한다. 슬픔과 고통만큼 개인적인 것도 없기 때문이다.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자기를 느끼는 것, 남이 아닌 자기를 확인하는 것과 같다. 나는 오직 고통 속에서만 내가 된다. 일반적으로 고통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아 참된 지혜로 인도하기보다는 맹목적으로 자신에게 집착함으로써 도리어 사람을 이기적이고 어리석게 만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종일관 일신보전에 급급하는 에 등장하는 엘렉트라의 여동생 크리소테미스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고통에 대한 반성의 부재를 탓할 수만도 없다. 고통이 강렬할수록 그것에 대한 반성이 어려워진다. 우리는 대개 고통을 반추하기 보다는 망각하는 것이 건강한 일이라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통의 체험을 반추하기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가 돌이킬 수 없이 고통에 굴복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고통을 두려워 피하려 할 뿐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갖지 못한 채 기억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스 비극의 첫 번째 미덕은 그것이 고통에 대해 반성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귀족적 문학은 인간의 고귀함을 개인의 내면성 속에서 고찰하는데 반해 시민적 문학은 동일한 것을 시민 공동체라는 사회적 지평 속에서 고찰한다. 예를 들면 호메로스의 영웅들의 고뇌와 정신의 숭고는 무엇보다 그들의 개인적 삶의 문맥 속에서 표현된다. 여기서는 사람이 사는 사회적 문맥 역시 거의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의 시대는 인간을 철저히 폴리스, 즉 시민 공동체 속에서 이해한 시대이다. 폴리스란 인간 공동체들 가운데서도 가장 이상적인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한 인간의 삶과 행위의 탁월함 역시 그것의 순수한 내적 가치를 통해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시민 공동체의 온전함을 통해 검증되어야 했다. 비극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삶을 고찰한 예술이다. 그것은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상적인 인간성이 아니라 시민 공동체라는 지평 속에서 고찰한 예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삶을 시민 공동체의 지평 속에서 고찰 할 때 우리는 삶을 지배하는 운명의 비합리성과 맹목성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호메로스적 세계에서 운명의 맹목성은 그에 사로잡힌 인간이 자기의 용기와 탁월함을 보여줄 수 있는 디딤돌이 된다. 여기서는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까닭에 도리어 그는 숭고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 공동체의 차원에서 본다면 의로운 사람이 예측 못한 운명 앞에서 파멸하고 불의한 사람이 행운을 얻는 일이 비일비재한 나라는 온전한 나라일 수 없다. 정의의 원리가 확립되지 않은 사회가 온전한 사회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 소포클레스의 와 셰익스피어의 햄릿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