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eat Empire - Rome을 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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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The Great Empire : Rome을 본 후...
사람들에게 화산폭발로 인해 이미 널리 알려진 로마의 도시인 폼페이를 시작으로 팍스로마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상 깊은 영상자료였다. 폼페이는 시민에게는 화산으로 인한 재난이었으나 그로 인해 화석으로 유적이 보전이 되어 후세에게는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이 되었다. 그리고 그 모습으로 로마의 번영을 보여준다. 팍스로마나는 BC1세기 말 제정을 수립한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5현제시대까지의 약 200년간 계속된 평화를 말하는 것으로 로마의 평화라고도 한다. 이 시대는 변경의 수비도 견고하였고 이민족의 침입도 없었으며 국내의 치안도 확립되어 교통 물자의 교류도 활발하였고 로마제국 내의 각지에서 도시가 번영하여 평화를 구가했던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팍스로마나 시대 로마제국의 다양한 문화와 중무장한 로마 지중해 세계 초강대국이며 로마법을 통일하였고 북아프리카, 시리아, 중동, 이집트 지역까지 로마제국의 일부였다. 그리고 폼페이는 그런 시대에 상류층들이 오는 휴양도시로서 독특하고 색다른 향신료로 유명했던 도시였다. 그리고 서기 79년 8월 24일 오후 폼페이 서북쪽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유례가 없는 엄청난 양의 용암과 화산재는 삽시간에 산줄기를 파도처럼 흘러내리며 상류층의 휴양지로써 사치와 향락의 극치를 이루던 로마 제국의 도시 폼페이와 에르콜라노 등 주변 도시를 삼켜 버렸다. 모든 것은 30분 남짓의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흔히들 폼페이를 구약성서에 나오는 사치와 쾌락의 극치를 이루던 소돔과 고모라 성을 신이 유황불로 불태움으로서 심판한 것과 비유하곤 한다. 이탈리아 반도 캄파니아 지방의 도시들은 대부분 그리스 인들이 세웠는데, 폼페이는 이와 달리 기원전 9~8세기에 오스칸 족들이 세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스칸 족은 용암이 흘러 이루어진 넓은 대지 위에 도시를 세웠는데, 이 곳은 주변 타민족으로부터의 침입을 막기에 적합한 지리적 여건을 갖고 있었고, 또한 화산 지대여서 땅이 매우 비옥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후 폼페이는 주위의 그리스 식민 도시들과 접촉을 갖게 되면서 그리스 문화를 많이 받아들이게 되고 기원전 5세기 무렵 삼니움의 영향을 받게 된다. 지금도 볼 수 있는 폼페이의 중심부는 이때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삼각형 공회장과 포룸, 아폴로 신전 내부의 공공 건물들이 삼니움 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그 후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에서 시작한 로마가 그 세력을 팽창해 가면서 남부 이탈리아로 진출해 내려오면서 삼니움과 세 차례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제3차 전쟁이 끝난 후 폼페이는 로마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부터 폼페이의 역사는 로마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기원전 91년에서 89년 사이에는 로마에 항거하여 투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로마군에게 굴복하면서 완전히 로마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폼페이는 로마의 영향권 아래에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게 되고 경제적으로 크게 번성하게 된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하자 폼페이는 다른 도시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고 생활 수준 또한 매우 높아졌다. 교역과 해운업이 발전함에 따라 상인과 기업인들이 늘어나고, 이들 신흥 갑부들은 경쟁적으로 화려한 저택을 세웠다. 하지만 이런 부의 축적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로 인하여 로마내 권력자들의 영향이 미치기 시작하였고 정치에 관여하게 된다. 그런 행동의 일환으로 이들은 화려한 저택과 보석 등으로 전통적으로 권력을 누리던 귀족들의 권세를 누르려 하기도 했었다.
폼페이 도시의 화산으로 인한 재해는 서양 문화의 모태가 된 고대 로마의 모습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 주는 세계 유일의 열린 박물관 도시이다. 화려한 귀족들의 저택에서부터 농민들의 주거 유적, 그리고 여행객들이나 선원들을 위한 창녀촌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의 다양한 모습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폼페이에는 당시에 그려진 벽화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예술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이전까지는 고대 로마의 미술에 대한 정보와 자료는 어쩌다 한 번씩 발굴되는 고대 프레스코 벽화 파편들을 제외하고는 극히 드물었는데, 폼페이의 발굴로 로마의 예술 전반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된 것이다. 모자이크, 벽화, 조각 등의 작품들이 그 안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남은 유적들을 보면 데르모폴리아라는 뜨거운 음식을 팔았을 것같은 가판대가 있는데 그 당시 지금 뉴욕에서 바쁜 사람들이 빠르고 손쉬운 끼니를 먹는 것처럼 활발한 활동이 있음을 나타내는 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밀가루, 빵, 올리브, 돼지고기, 양고기, 생선소스 가룸(고등어 발효-고가품) 등을 팔았을 것 같은 식료품점 등이 보인다. 특히 가룸의 경우 고가품이기도 하였고 AD 70-80년대에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하였으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 가업을 잇지 않았을까하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음식문화뿐만이 아니라 건축양식 역시 화려하다. 바닥은 돌조각과 타일로 모자이크 형태로 장식하였고 집안내부에는 만찬을 할 수 있는 식당이 있었으며 그 당시 검소한 연회를 하게 되면 노예가 다양한 음식을 끊임없이 날랐다 하니 그 규모는 상상할 만 하다. 그리고 저녁식사 후 무희와 곡예사가 일종의 퍼포먼스를 하고 포도주를 마시며 시낭송을 하는 등 현대시대의 디너쇼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보아도 그 당시 폼페이란 도시의 부의 축적정도가 엄청남을 알 수 있고 의식주에 대한 문제 해결은 물론 쾌락의 요소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일환으로 매음굴을 들 수 있다. 매음굴에는 자신의 주특기인 체위를 벽화에 그리고 그곳을 찾은 남자들은 성행위 후의 느낌을 벽에 적는 등 약간은 적나라한 성문화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눈여겨볼 것은 매음이 합법적이며 세금을 낸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창제도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국가가 운영하는 매음굴로 세금을 내면서 운영하며 성행위 매매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초대 교구인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사회의 오염물질을 버리는 하수구라 하여 공창제를 지지하였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정치경제외교적인 문제가 많았을 때 스포츠를 권장하여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던 것과 ehR같은 이치라 할 수 있겠다.
AD 1C 로마의 황제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속주출신에게도 균등해졌다. 속주출신의 원로원이 탄생하였고 트라이아누스 장군이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가 되었다. 그는 완벽한 군주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갈리아 출신으로 속주 출신 황후를 맞이하였고 황후는 사치와 낭비벽이 심하였고 현대구조와 유사한 구조를 가진 세계 최초의 쇼핑몰로 추정되는 건물이 그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대의 최고의 유적은 트라이아누스의 대규모 도로 공사였다. 길이 85000km에 달하는 간선도로로 속주와 로마를 연결하여 거리를 좁혔고 이로 인해 속주의 권력자들의 세력도 상승했다. 또한 도로를 바탕으로 로마지역의 인프라를 구축 군대기술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정복전쟁시 군대의 이동수단으로 이용하였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생긴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지 군사이동로로만 이용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문물의 교류에도 한 몫을 하였다. AD100년경에는 건축기술과 문화가 도로를 통해 영향을 주고 납으로된 수로 파이프인 수도교 건축사업을 통해 중요한 수원을 확보하였으며 복잡한 배관시스템을 운영하여 공중화장실을 운영하였다. 또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는 등 군사문화면에서도 많은 발전이 있었다. 종교면에서는 유피테, 바쿠스, 아폴로 등의 수호신을 믿었어쓴데 시간이 흐르자 도로로 인한 원활한 문명의 교류로 변방속주들의 종교가 유입되었으며 AD100년경에는 현실세계를 중요시하며 현실과 밀접한 종교가 유입되었으며 로마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주는 대신 로마국가신을 정하여 충성심을 고취시켰다.
AD117년에는 군인인 하드리아누스가 전통을 거부하고 턱수염을 기른 최초의 황제로써 미천한 신분과도 친하게 지내며 스스로 인민의 황제라 칭하였고 평화주의자로 속주의 평화와 번영을 바라고 속주 출신의 관리를 등용하며 법률개혁을 통해 노예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등 팍스로마나 시대의 5현제 중 한 사람으로써의 면모를 보여줬다. AD121년, 하드리아누스는 속주총독을 만나기 위해 로마제국을 순방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자신을 알리고자 하기도 하였고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도 있었고 그의 방랑벽 때문이라는 말도 있지만 로마황제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위엄과 능력의 과시를 위해 순방하였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그의 세 번째 순방은 AD130년에 오시리스신과 이시스신을 믿는 나일강을 유람하여 이 당시 이집트까지 세력을 넓힌 로마의 힘을 보여주었으며 AD131년에는 로마의 골칫거리인 저항운동의 중심인 유대인과 부딪히게 된다. 유대교는 유대인을 바탕으로 저항정신이 투철하였으며 그들만의 신을 믿는 종교로써 로마의 신을 믿지 않는 등 다른 종교와는 많이 달랐다. 이에 로마는 AD66년 예루살렘을 침범 핟ㄱ살하였으며 AD73년 마사다 요새를 점령하고 학살하고 유대교를 금지하는 등 로마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었다. 이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로마인에게는 자신감과 신민의식을 속주에게는 복종의 전시효과를 거두었다. 이처럼 로마는 팍스로마나 시대를 유지하기 위해 양면정책을 사용하였다. 로마를 따르는 속주에게는 자치권과 시민권을 부여하는 등 당근을 주는 반면 따르지 않는 속주에게는 철저하게 전멸시키고 파괴하는 등 채찍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AD132년 유대교의 탄압에 대한 저항이 시작되고 4년전쟁 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반란을 진압하고 그 이후 정치적인 행위까지 간섭하게 된다. 그리고 AD 136년 황제는 죽고 다시 정치 경제적으로 대등한 대우를 받게 되며 이 때부터 권력은 로마에서 속주로 퍼져나가게 된다. 팍스로마나 시대의 큰 특징을 간추려보면 최대의 영역을 점령하였고 최대의 방어와 안전을 보장할만큼 국토방위가 안정되어 있었고 하드리아누스황제 재위 당시 황제의 영향으로 그리스적 취향의 문화가 많이 발전하였으며 건축면에서도 콜로세움, 극장, 대중목욕탕 등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재밌는 것은 이 당시의 팍스로마나와 현대의 팍스아메리카을 비교하곤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