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C와 NCCK의 연합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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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WCC와 NCCK의 연합활동
과목: 에큐메닉스 지도: 서정민 교수님 발제일: 2010년 12월 1일 발제자: 장재호(서울대 종교학과 박사과정)
I. 서론
Ⅱ. WCC와 NCCK의 연합활동
Ⅲ. WCC와 NCCK의 연합활동 평가 및 전망
Ⅳ. 결론
* 참고문헌
I. 서론
NCCK NCCK는 ‘장감연합협의회(1918)’로 시작하여, ‘예수교연합공의회(1924)’, ‘한국기독교연합회(1946)’로 개명하였다가, 1971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The National Council in Korea)’로 명칭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약어로는 KNCC로 불리기도 하나, 본 발제에서는 협의회가 공식으로 쓰는 명칭인 NCCK를 본 발제에서 시대에 관계없이 사용한다.
가 창립되기 이전부터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세계에서 열리는 기독교대회에 참석했다.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에큐메니칼대회로 평가할 수 있는 1910년 에딘버러 선교대회에 윤치호가 참석했으며, 1913년 주일학교 세계대회인 취리히 대회에 신흥우가 참석했다. NCCK 창립 창립 시기는 역사적 자료에 근거해서 ‘장감연합협의회’가 창립된 1918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나, NCCK는 1924년을 창립시기로 명시한다.(http://www.kncc.or.kr/Intro/introduction.asp?introKind=meaning) 아무래도 ‘장감연합협의회’라는 명칭은 교단을 한정하는 어감이 있어서 창립 시기 6년을 포기하고 ‘예수교연합공의회’라는 명칭을 선택한 것 같다.
이후에는 예루살렘 선교대회(1928)를 통해 IMC에 정식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WCC 제1차 총회에 당시 NCCK의 총무였던 김관식, 청년대표로 엄요섭이 참여함으로써 NCCK는 WCC 창립 멤버가 되었다.
WCC 창립 이후 WCC와 NCCK는 계속적으로 도움을 서로 주고받았다. 본 발제에서는 한국의 문제해결을 위해 WCC와 NCCK가 지금까지 서로 어떠한 관계를 맺어왔는지 살펴볼 것이다. 나아가 이 연합활동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고찰해 볼 것이다.
Ⅱ. WCC와 NCCK의 연합활동
1. 한국전쟁
WCC는 특정한 정치적신학적 노선을 가진 단체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명백해 보이는 사건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해왔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음 날 NCCK는 IMC와 CCIA(국제문제교회위원회, WCC와 IMC에 의해 공동으로 설립된 기구)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문을 보냈다. 7월 3~5일에 토론토에서 CCIA 집행위원회가 열렸으며, 여기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한국의 충돌 상황에서 WCC 회원교회들이 사용할 기도문’, 그리고 ‘한국 교회에 대한 성명서’를 준비하여 제3차 WCC 중앙위원회에 제출했다. WCC는 7월 8~15일에 토론토에서 중앙위원회 개최하고, ‘한국 상황과 세계질서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토론토 성명은 한국전쟁을 북한의 남침으로 규정하였고, UN의 ‘경찰행동’을 지지하였다. 이는 비교적 중립단체인 UN 한국위원단이 현장에서 남침임을 결론 내렸고, UN 안전보장이사회가 UN의 경찰 조치를 결정한 뒤였기 때문에 WCC 결정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교회가 세계질서의 방어를 위해서 무력의 사용을 권고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남았다. 무력사용을 반대하는 대표들도 있었지만, 별로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김흥수, “WCC의 한국전쟁 성명과 공산권 교회들,” 『한국근현대사연구』 (한국근현대사학회, 2003), 211~215.
성명서 발표 직후, 미국교회협의회(Federal Council of Churches of Christ in America)는 WCC가 “신속하고 활기 있는 행동”으로 응답한데 대해 감사를 표명했으며, 교회 내의 몇몇 평화운동 단체들이 미국교회협의회의 입장을 뒤따르는 성명을 냈다. The Church Peace Union과 The American Council of the World Alliance for International Friendship Through Religion은 공동으로 낸 성명에서 미국교회협의회의 입장을 뒤따랐다. New York Times, July 7, 1950 (김흥수, “한국전쟁과 세계교회협의회, 1950~1953,” 『한국기독교와 역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p. 123에서 재인용)
문제는 이 중앙위원회에 공산권 국가 중 한 명의 중국위원만 참석했고, 동유럽에서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공산국가인 동유럽 교회들과 중국교회로부터 동서간의 냉전에서 WCC가 한 편을 들고 있다는 비난을 들었다. 헝가리 개혁교회 총회장인 베레츠키(Albert Bereczky) 감독은 WCC 총무 비셔트 후프트에서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분쟁의 기원이 서방세력의 제국주의적 태도에 있기 때문에 WCC 중앙위원회는 서방세력에 참회를 요청하는 메시지를 전달했어야 옳았다”면서 “기독교 국가들의 죄에 대해서 침묵을 지켰던 교회들은 이제 이 국가들을 편들 권리가 없다” “Hungarian Bishops on Church-State Relations and International Affairs,” Christianity and Crisis, October 16, 1950, p. 136. (김흥수, “WCC의 한국전쟁 성명과 공산권 교회들,” p. 217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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